"(민주당) 광주 경선 후 조순용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경선 결과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갖고 DJ 앞에 섰다. 조순용은 노무현이 광주에서 이긴 원인을 첫째, 둘째, 셋째하며 정리한 자료를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그 때 DJ가 말했다. '이 사람아, 노무현이 이긴 건 조선일보와 싸워서 일등을 한 거야.' 유종필의 증언이다."

2002 대선 후보 토론회 사회자로 활동했던 엄광석 SBS 대기자(59)가 지난달 말 출간한 <2002 대선 음모>(청어)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노무현, 이회창, 정몽준, 이인제 후보 진영의 참모와 특보들의 증언을 비롯해 엄 대기자 스스로의 경험을 토대로 지난 대선 과정을 추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제목에 부합할 만큼 '모종의 음모'의 실체를 밝힌 내용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또 방송의 편파성 언급 등에 있어 논란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으나 정치인들의 생생한 증언이나 토론회 에피소드 등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책의 주요 목차는 <노무현, 광주에서 불을 당기다> <조선일보와 노무현의 싸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한나라당의 반응> <대선 전야, 천당과 지옥> <화초는 잡초를 이기지 못한다> 등이다. 

엄광석 대기자는 1972년 TBC 사회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 KBS 사회부 차장, 주미공보관 등을 거쳐 90년 SBS에 입사, 편집부장, 경제부장, 기획부장, 뉴욕특파원(국장) 겸 지사장, 해설위원실장, '토론공방' '뉴스라인' 앵커 등을 지냈다.

다음은 이 책에서 특히 언론과 관련된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경어체로 된 인용문은  축약을 위해 평어체로 정리했다.

'킹메이커' 강준만 교수

노무현 후보의 불을 지핀 것 중의 하나가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노무현이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결정적 계기를 이루는 광주 경선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노무현을 위해 헌신적으로 뛴 노사모나 젊은 개혁 지지세력에게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유종필 전 노무현 후보 언론특보는 이렇게 말했다. "2001년 6월 노무현 캠프를 처음 찾아갔을 때인데 사무실 안에 강준만의 이 책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 책을 읽고 노 후보에 대해 많을 걸 알았다. 깊은 감명도 받았다. 한마디로 노무현에게 유리한 자료를 집대성한 책이었는데 특히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먹혔고 노무현을 위해 몸바쳐 뛴 지지자들의 가이드라인 같은 역할을 했다. 하루는 노무현 후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강준만이 이 책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한번 만나자고 했더니, 자기는 정치인은 안 만난다, 출판물에 나온 자료만 근거해서 책을 쓰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준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DJ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하는 거야"

SBS는 민주당 경선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두 달 전 방송사로서는 맨 먼저 '2002 민주당 경선후보 토론회'를 열었는데, 필자가 사회를 맡았다. 이른바 '7룡'을 매주 한 사람씩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이 중 2월1일 열린 노무현 후보 편은 토론의 내용이 그리 알맹이가 없었고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겠다는 비전 제시도 구체성이 없었다. 또 토론회장에 따라온 노무현 캠프의 스탭도 서너명 밖에 되지 않는 초라한 규모였다. 반면 2월 15일 출연한 이인제 후보의 경우 따라온 참모진도 국회의원을 비롯해 수십 명 규모여서 출연자 대기실이 모자랄 정도였다.

필자는 노 후보 초청 생방송 토론을 끝내고 출연자 대기실에서 함께 분장을 지우다가 노 후보에게 물었다. "집권당의 후보가 되려면 동교동의 지원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데 DJ와는 만났는가?"

이 때 노 후보의 대답이 신선했다. "솔직히 만난 일이 없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들었다. 제가 16대 (총선) 때 따 논 당상이라고 여겼던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내려간 것을 보고 DJ가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하는 거야'라고 측근들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노 후보의 표정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이인제, SBS 송도균 사장에 직접 항의전화

2002년 3월 14일. 광주 경선을 이틀 남겨 놓고 SBS와 문화일보는 TN소프레스에 의뢰,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는 민주당 어느 누구와 대결해도 이기는데 유독 노무현 후보에게만 1.2% 포인트 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가 광주 경선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노무현 후보, 이인제 후보 진영의 공통된 증언이다.

이인제 후보는 SBS·문화일보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분노가 극에 달해 SBS 송도균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뜻이 있는지 있는 건 아니냐"라면서 고함치듯 언성을 높였다. 김윤수 특보에게는 TN소프레스에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호통을 쳐 김 특보가 TN소프레스 김헌태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을 정도였다. 이인제 후보 진영은 이 무렵부터 청와대 음모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정몽준과 김근태의 '감투'

이해찬 의원은 정몽준 의원을 영입하기 위해 문화부 장관직을 제의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DJ는 처음에는 노무현보다는 오히려 이인제나 정몽준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실제로 정몽준에 대해서는 영입을 지시한 적도 있다. 그래서 문화부 장관 자리를 제의했는데, 정몽준 의원이 외교부 장관을 고집하는 바람에 영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MJ가 입각과 함께 민주당에 입당했더라면 민주당 경선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민주당 경선 후보 7명 가운데 국민적 지명도에 비해 공직다운 공직의 경험을 갖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김근태 후보였다. 학생운동, 투옥, 고문, 반정부 활동 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느라 이렇다할 경력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DJ정권에서 공보수석과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박준영은 최근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여권 내에서 경선에 나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사람들 가운데 김근태 의원만 공직 경험이 없다. 형평의 차원에서 그에게도 장관이나 뭐나 그런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건의했다. 그랬더니 DJ가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동기 제공

대선을 48일 앞둔 2002년 11월 2일. 하루 전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34%, 정몽준 22.6%, 노무현 19% 지지율을 기록했고 당 안팎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여론이 부상했으나 노 후보측은 이에 부정적이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날 조선일보가 4면 박스로 <민주 "노·정 단일화" 압력 확산>이라는 4단 기사와 <노·정 신경전>이라는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를 본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선기획단장은 아차 싶었다고 한다.

"당시 민주당은 노무현 사수대와 후단협으로 갈라져 극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노무현 사수파는 끝까지 밀고 나가면 선거에 패배하더라도 5년 후가 보장된다는 생각으로 신당까지 추진하자는 입장이었지만, 단일화가 안되면 필패라는 후단협의 주장도 설득력을 얻었을 때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조선일보가 이렇게 치고 나온 것이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조선일보가 이제 앞으로 1주일간 노 후보에게 계속 단일화로 압박하고, 다시 1주일간은 단일화 거부라는 명목으로 노 후보를 공격하는 전술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선거는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노 후보를 만나 '차라리 잘 됐다. 이참에 조선일보의 전술을 뒤집어엎자. 조선일보를 엎어치는 것은 우리가 먼저 단일화를 제의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노 후보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고 하더니 저녁 때 선대위 회의를 열어 단일화 제의를 전격 제의했다."

이해찬 의원의 '조선일보 전술' 해석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현실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 조선일보가 그런 의도를 갖고 기사화했다는 점도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이 기사가 단일화의 동기를 제공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민주당 선대위가 조선일보의 보도에 자극 받아 후보단일화 제의를 먼저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객관적 상황에도 부합한다.

토론으로 본 노무현과 이회창

토론에 있어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는 매우 대조적이다.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반론을 펴는 방법도 다르다. 필자는 2002년 대선 때 대통령 후보를 가장 많이 만난 사회자였다.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를 각각 3번씩 초청해 토론회를 주재했다.

필자는 대선 두 달을 남겨 놓고 진행한 토론회에서 노무현, 이회창 후보에게 각각 아픈 질문 한가지씩을 했다. 이 질문들이 두 후보에게 아픔의 정도가 비슷한지 숙고를 거듭해야 했다. 10월 18일 노 후보에게는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타계했을 때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이라며 문상을 가지 않았다는데 포용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순간 노 후보의 표정에서 곤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갔으나 그러면서도 노 후보는 선선하게 자신의 포용력 부족을 인정했다.

10월 25일 이회창 후보 차례에서는 한인옥 여사의 '하늘이 두 쪽 나도 정권을 잡아야 한다' 발언에 대해 물었다. 집권하면 한풀이 정치가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방송사 조정실에서 이 생방송을 진행하던 한 PD는 내가 이회창 후보에게 하는 질문을 들으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그만큼 민감하고 위험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 후보 역시 잠시 감정을 추스르더니 절대 보복정치는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원창 의원은 이회창 후보의 패인이 노무현 후보의 감성에 호소하는 토론을 이기지 못했고 따뜻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대선 토론 현장에서 두 사람의 숨결까지 감지하며 토론을 벌였던 필자로서는 이원창 의원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낙연 대변인의 '노 당선자 한겨레 방문' 해명

이낙연 의원의 말이다. "노 대통령은 일단 확신이 서면 관계 참모와 상의를 하는 절차를 건너 뛴다. 이것이 즉흥적으로 비쳐진다. 인수위 시절 원로 외교관들과 오찬을 한 적이 있는데, 오찬 이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당연히 인수위 사무실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수위로 가자면 왼쪽으로 차를 틀어야 하는데도 갑자기 우회전을 하는 것이었다. 뒤따르던 나도 놀란 채로 우회전을 했다. 그날이 바로 한겨레신문을 방문한 날이다.

언론사를 방문한다면 대변인인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데 정말 당황했다. 나중에 대통령에게 왜 한겨레 방문 사실을 미리 귀띔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반대할 것 같아서 그랬다'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한겨레신문을 찾은 것은 김일성을 두 번이나 만난 사장이 있고 미국 특파원을 하면서 남북 관계에 전문적 식견을 가진 논설위원을 만나기 위해 방문했다'라고 얼버무려 언론에 브리핑을 한 적이 있다."

한겨레보다 조선일보를 찾았어야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기 개혁 세력을 편가르고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어우르는 데 실패한 것이 사실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조선일보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는 필자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전혀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한겨레를 찾을 게 아니라 조선일보에 먼저 갔어야 했다. 적어도 문제해결에 있어 정면 돌파한다는 그의 방식대로라면 말이다.

조선일보사에 가서 방상훈 사장도 만나고 변용식 편집국장도 만나고 김대중 주필도 만나서 '당신들 덕택에 대통령이 돼 정말 고맙다. 앞으로 잘해보자'라고 했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대한민국 열독률 1위의 거대 언론권력이기 때문에 미리부터 비굴하게 타협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가서 당당하게 그가 평소 조선일보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간 김에 편집국에도 들러 기자들과 즉석 토론을 하면서 그 동안 조선일보가 자신에게 했던 '왜곡보도와 악의적 비판'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따지며 항의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선 당일 아침 게재된 사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중동 대 한경대, 그리고 방송

대한민국 언론은 선거 때만 되면 몸살을 앓는다. 독자 여러분은 조·중·동(조선·중앙·동아)과 한·경·대(한겨레·경향·대한매일)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2002년 대선에서 조·중·동은 이회창 후보를 밀었고 한·경·대는 노무현 후보를 지원했다. 그러니 선거 결과는 보나마나 한 것처럼 보였다. 영향력이 큰 메이저 신문들이 거대 야당의 후보를 밀었으니 게임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거결과는 이런 예상을 뒤엎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방송이라는 변수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요즘 세상에서 신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투표장에 가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저 대충 제목이나 훑어보고 어쩌다 관심을 끄는 기사만을 골라 읽고는 무엇이 그리 무거운지 그만 놓아 버리고 만다. 그런데 방송은, 특히 TV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정보를 안겨준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TV에 나오는 후보에게서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인상과 이미지에 의해, 그리고 방송에서 뭐라고 했다더라 라는 입소문을 듣고 투표장에 간다.

그런데 선거 중반 이후 일부 방송이 여당 편향성을 보이면서 사태가 달라졌다. 조·중·동과 한·경·대로 나뉘어 편가르기 하던 싸움은 메이저 신문 대 방송이라는 새로운 편가르기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3월 KBS 창립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방송이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거북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방송의 영향력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말은 방송이 중립을 지켜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던져 주고자 한 말이겠지만, 막판에 방송의 편향된 기울임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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