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여당은 최근 급작스럽게 통합방송법안의 국회상정을 유보키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관련 부처와 업체의 반발이 워낙 거세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정부여당은 통합방송법안 상정을 유보하고 조만간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법안을 재검토한 뒤 내년 3월경 국회에 상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양만으로만 본다면 ‘유보’에 다름 아니지만 우리는 이같은 조치를 언론정책의 퇴행이라고 규정한다. 통합방송법의 국회상정 유보는 ‘원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통합방송법은 지난 4년 동안 무수한 논의를 거쳐 어렵게 성안된 것이다. 비록 일부 조항의 경우 국민 여론이나 방송계의 바람과 상치되기도 했지만 법률안 마련과정에서의 투명성과 취지의 정당성만은 인정받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이같은 통합방송법안의 국회상정 유보 이유로 ‘각계의 반발’과 ‘방송정책의 난맥상에 대한 진단’을 들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통과 절차나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법안 내용을 재손질할 것임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더 큰 문제는 지금까지 각종 이견이 제시됐던 일부 조항을 손질하기 위한 것이라면 일단 국회에 상정해 놓고 심사과정에서 처리하면 될 터인데도 굳이 상정 유보의 길을 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법률안의 뼈대를 다시 세우겠다는 뜻으로 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이다. 도대체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 제고라는 통합방송법의 취지 이외에 다른 어떤 대안이 있길래 뼈대 자체를 건드려야 한다는 것인가.

더구나 정부여당은 자신들이 공언했던 방송청문회 개최에 대해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지금에 와서는 개최를 하는건지 안하는건지 조차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정부여당이 ‘방송정책의 난맥상 진단’을 통합방송법 유보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정부여당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정부여당이 구상하고 있다는 별도의 위원회 구성안도 그렇다. 아직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아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통합방송법 제정 취지와는 상치된다는 것이다. 정부여당은 대통령 직속으로 각계 대표인사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설령 그것이 구성된다 하더라도 결과는 관주도의 방송재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사실 통합방송법에 관한 한 각계의 의견은 들을 만큼 들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런 판단일 것이다. 지난 4년여간의 과정에서 각종 관련 기관과 시민단체들이 백화제방식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했고 공식적인 의견수렴절차도 허다하게 거쳤다.

이런 마당에 위원회를 신설해 다시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요식 행위에 그칠 수밖에 없으며 실상으로는 정부여당의 ‘복안’을 슬쩍 끼워넣는 결과를 빚을 공산이 큰 것이다.

이와 관련해 언론계에서는 벌써부터 제3의 방송구조개편 이야기가 돌고 있다. 정부여당이 통합방송법안의 국회상정을 유보하고 위원회를 신설키로 한 데에는 통합방송법 그 자체보다 방송계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개편을 단행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며, 이런 결정의 이면에는 내각제 개헌 문제 등 복잡한 정치사안이 돌출할 내년도를 대비한 정치적 판단이라는 소문이 벌써부터 무성한 것이다.

만일 이같은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현 정부는 제1, 2차 방송구조개편을 감행했던 6공이나 소위 문민정부와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방송구조개편과 통합방송법은 별개의 문제라는 원론적인 지적은 차치하더라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국의 문화정체성을 좌우하는 방송을 정권의 정치논리에 따라 임의적으로 재단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부여당은 지금이라도 입장을 번복하고 정도로 되돌아서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를 토대로 최선의 통합방송법안을 제정해야 하며, 언론개혁의 당위에 부응해 다른 법률안들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

또 방송개혁이 필요하다면 통합방송법에 따라 구성될 통합방송위원회를 중심으로 민주적으로 진행토록 조건을 마련하는 게 순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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