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제작사들의 드라마 스태프 계약서에서 근무시간·급여 기준 미명시와 52시간제 미준수 등 근로기준법 위반 항목이 광범위하게 확인됐다. 고용노동부가 2년 전 드라마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확인했지만 근로계약을 체결한 곳은 없었다. 최근 판례로 노동자성이 속속 확인된 감독(팀장)급 스태프를 사용자로 내세우며 ‘5인 미만 사업장’도 난립하는 상황이다.

‘드라마제작 현장의 방송스태프 계약실태 및 문제점·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3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박정⋅정필모⋅이수진(비례) 의원, 민주노총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드라마 방송제작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적용을 위한 공동행동 등이 토론회를 주최했다.

발제에 나선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20개의 드라마 스태프 계약서를 검토한 결과, 계약서들이 제작사 또는 방송사의 스태프 업무에 대한 결정권과 계약해지권을 명확히 하면서도 △근로시간·휴게시간 △임금 지급 기준·시기 △휴일·휴가 등 근로기준법상 명시해야 할 항목은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고 밝혔다.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13일 열린 ‘드라마제작 현장의 방송스태프 계약실태 및 문제점․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발제하고 있다. 이수진 의원실 유튜브 갈무리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13일 열린 ‘드라마제작 현장의 방송스태프 계약실태 및 문제점․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발제하고 있다. 이수진 의원실 유튜브 갈무리

대다수 제작사는 근로계약서 아닌 업무위탁․하도급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는 사례도 나왔다. 윤 변호사는 “업무위탁, 하도급 계약서는 스태프가 개인사업자이자 프리랜서라는 전제로 쓰는 계약”이라며 “법상 노동자와 근로계약을 하지 않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처벌 사항”이라고 했다.

대법원 노동자성 판단 기준과 최근 판례에 따르면 촬영감독 등 감독급 스태프도 근로계약 체결 대상이다. 노동부는 2년 전 감독급 스태프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서 제외하는 판단을 내렸으나, 법원이 이를 뒤집고 지난 2019년과 지난해 10월, 올 6월 이들의 노동자성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놨다. 윤 변호사는 “법원은 (노동부가 노동자성 제외 근거로 삼은) 전문성과 경험은 단지 업무 특성에 불과해 근로자성을 부정할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봤다”며 “노동부의 감독급 스태프에 대한 판단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특히 KBS의 경우 외주제작이라지만 총괄감독·연출·카메라감독이 모두 정직원인데, 이들이 무슨 장면을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찍고 어디에 조명을 들이댈지를 결정한다. 감독급 스태프는 이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이들을 근로자라 판단하지 않으면 현실과 법이 괴리된다”고 했다.

계약서 면면을 보면 제작사·방송사에 대한 스태프 종속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계약서는 모두 스태프가 ‘제작사가 정한 일정과 방식에 따라 제작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윤 변호사는 “제작사는 계약서에 근무시간과 출발시간, 촬영지 관련 내용을 정했다. 단체톡방으로도 제작사 측의 구체적 촬영시간과 세부 업무 지휘·감독이 끊임없이 이뤄진다”고 했다.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이 ‘드라마제작 현장의 방송스태프 계약실태 및 문제점․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수진 의원 유튜브 갈무리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이 ‘드라마제작 현장의 방송스태프 계약실태 및 문제점․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수진 의원 유튜브 갈무리

모든 계약서엔 스태프가 제작사 동의 없이 다른 일을 할 수도, 제3자에 업무를 맡길 수도 없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윤 변호사는 “이를 통해 스태프 임금이 노동력에 대한 보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근로기준법이 명시하도록 정한 노동조건 항목들은 계약서에서 빠져있다. 소정 근로시간과 휴게시간을 명시한 계약서는 한 건도 없었다. 계약서들은 “촬영시간부터 종료시까지” 또는 “버스가 촬영지로 출발한 뒤부터 현장에서 촬영을 마칠 때까지”를 근무시간으로 정했다. 윤 변호사는 “그 자체로도 위법이지만, 실제 현장에서 업무는 주 40시간, 최대 52시간도 초과한다”고 했다.

다수 계약서가 하루 16시간까지 근무 가능하도록 정했다. 하루 8시간 넘는 근무시간을 설정할 수 수 없도록 한 주52시간제 위반이다. 이동, 준비, 정리시간은 근무 시간에서 제외됐다. 근로기준법은 계약서에 임금의 결정과 계산, 지급방법과 지급 시기, 금액 기준을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지만, 스태프 계약서는 설명 없이 일당만 명시했다. 유급휴일과 공휴일, 연차휴가 보장도 지켜지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노동조건 위반을 바로잡고 고발해야 할 당국이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은 “현장에서는 주 52시간제도가 시행되고 노동자성이 이미 인정받았는데도 왜 아직도 근로계약이 도입되지 않는지, 왜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데 아무런 처벌이 없는지,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고 했다. 이날 지부가 공개한 드라마스태프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시간 가까운 장시간 노동이 가장 큰 문제로 꼽혔고, 정부가 추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책으로 장시간 노동방지(75%)와 근로계약 의무화(63.1%)가 꼽혔다.

▲ ‘드라마제작 현장의 방송스태프 계약실태 및 문제점․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3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수진 의원 유튜브 갈무리
▲ ‘드라마제작 현장의 방송스태프 계약실태 및 문제점․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3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수진 의원 유튜브 갈무리

노동부 측은 앞으로 노동자성 판단에 대법원 판례 동향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박세호 노동부 근로감독기획과 사무관은 이날 토론에서 “드라마 제작 현장 노동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게 근로자자성 판단이다. 대법원의 판단 기준에 따라 사실관계를 조사한다”며 “특정 직급을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쉽지 않으나 계약 형태에 관계없이 근로자성으로 판단하면 전면적으로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오고 있다. 개별사업장의 노사관계 사실관계를 파악해 합리적으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윤지영 변호사는 이에 “노동부가 2018~2019년 근로감독을 거쳐 감독급스태프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뒤 현장에 미치는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방송업에도 주52시간과 관련해, 조기촬영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기에 적용된 것인데 현장에서는 감독급 스탭을 팀원의 사용자로 만들어버리면서 이를 벗어나는 5인 미만 사업장이 난립하는 상황”이라며 “촬영시간은 감독급이 정할 수 없고 연출과 감독, 제작사가 정하는 것인데, 이를 5인미만으로 쪼개는 방식으로 탈피하려는 데에 착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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