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가끔 탄다. 여러 곳을 지나다 보면 갈등의 현장을 마주칠 때가 있다. 어김없이 플랭카드로 투쟁요구를 적어놓는다. 한 토지수용 갈등이 있는 곳을 지나나, 인상적인 플랭카드가 있어 메모해두었다.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택일하라”. 이것은 정말 힘겨운 싸움의 과정에서 나온 육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이런 류의 언어와 플랭카드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세상은 넓고 싸울 일은 많다?

이전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나는 약간 변형시켜서 ‘세상은 넓고 싸울 일은 많다’라고 표현한다. 이 문장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즉 ‘세상은 넓고 갈등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굳이 모든 사안을 가지고 적대적 투쟁과 갈등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상반되는 입장을 가진 2개의 신문을 구독해서 매일 아침 본다. 매일 아침, 하나의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제목을 가진 기사를 보게 된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반대의 해석프레임을 구독자에게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이럴 때면 학생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양극화’가 사회경제적 양극화 뿐만 아니라, 정치적 양극화, 의견의 양극화, 언론의 양극화, 신념의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보기에 따라서는 촛불시민혁명 이후의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것이고 긍정적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늘도 있다. 이런 적대적일 정도로 양극화된 시선을 서서 보니, 안 싸워도 될 일도 싸운다. 물론 이것은 참 어려운 문제이다. 동전의 양면같이 같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갈등은 다양하다. ‘같이 살던가 같이 죽던가 택일하라’는 식의 싸움도 있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양자택일적 갈등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조희연 서울특별시교육감. ⓒ미디어오늘
▲조희연 서울특별시교육감. ⓒ미디어오늘

 

87년 이전의 ‘절대악 대 다수 시민’의 구도의 변화

우리 사회는 87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권위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의 전환을 했다. 권위주의 말기에 우리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가 아니면 당장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싸웠다. 정권담당자와 민중의 관계도 그러하였고, 여야도 그러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독재라는 ‘악마’와 그에 대항하여 싸우는 민중이라는 ‘천사’가 존재하였다. 싸움은 선과 악의 십자군 전쟁처럼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런 적대적인 갈등을 촉발했던 군부정권은 시효를 다하였고, 87년 민주항쟁을 계기로 하여 민주화 시대로 이행하였다. 이른바 ‘87년체제’가 전제하는 ‘절대악 대 다수 시민’의 구도는 변화되었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져 있고, 갈등의 복합성과 다차원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의 가치에서 다수자적 존재가 다른 가치에서는 소수자적 존재가 되며, 한 개인에서도 천사와 악마의 성격이 공존하기도 한다. 이처럼, 민주화 30년이 된 지금 수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마인드로 접근하거나 그것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진보세력도 이런 의미에서 ‘87년 이후 체제’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집권정당과 권력--진보적 집권정당을 포함하여--이 여전히 이런 적대적인 정서로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면에서는 변화된 시대상황에 조응하여 마인드 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양극화적 관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숙한 민주주의란?

민주화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가끔 ‘성숙한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은 넓고 싸울 일은 많기 때문에, 당연히 싸울 일은 치열하게 싸우되, 가능한대로 적대적 갈등(목숨을 거는 것과 같은 마인드로 하는 갈등)을 비적대적 갈등으로 만들고, 갈등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해결되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갈등할 일은 많다. 갈등을 부인하고 이면화하는 보수적 시선도 있을 수 있지만, 갈등을 그대로 인정하되 ‘모든 갈등이 적대적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라는 변화된 민주적 시선도 있을 수 있다. 갈등의 현존을 인정하면서도 가능하면 민주주의의 개방성을 넓혀서 적대적 갈등을 축소하는 것이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물론, 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마인드 수준의 투쟁에 나서지 않고 민주적 프로세스에 의존해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선차적이다). 

성숙한 민주주의체제 하에서도 신원할 일과 갈등할 일은 많다. 나는 적대적 갈등의 많은 부분을 비적대적 갈등으로 만들고 정작 치열하게 싸워야 할 일 중심으로 싸우는 것이 한 사회의 정치역량이고 사회역량이라고 생각하고 교육을 통해 이런 역량이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쉽게도 여전히 이런 민주주의의 성숙함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전제해야 할 점들이 있다. 먼저 ‘싸울 일’과 ‘굳이 싸울 필요 없는 일’을 가르는 합의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어떤 의제의 경우 누군가는 ‘굳이 싸울 필요 없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목숨 걸고 싸울 일이라고 여긴다는 점을 전제한다. 또한 과거에는 ‘굳이 싸울 필요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이슈를 ‘싸울 일’로 바꿔 왔던 역사가 한국 민주화의 과정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예컨대 이른바 신사회운동적 이슈들은 그러하다. 나는 여기서 이런 점을 전제하고 논의를 한다. 

또한 현재의 우리 사회의 갈등은 민주화 초기와 달리 이른바 ‘97년 체제’ 하에서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한국사회와 경제에 내재화되면서 그 결과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진전됨에 따라 확산되는 점이 있다. 95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기조의 선언, 50년만의 야당정부인 김대중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급류가 한국사회와 경제를 휩쓸게 되면서 이른바 ‘20 대 80 사회’가 도래하였다. 세계화의 수혜 그룹(수출 대기업 주도 경제의 낙수 효과를 누린 중산층 정규직)과 나머지 사이의 격차가 확대된 것도 사실이다. 피케티가 이야기하는바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의 갈등은 상위 20퍼센트 안의 진영 갈등으로 협애화되고 있을 뿐이며, ‘브라만 좌파’가 사회 구조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상인 우파’와의 상징적 대립을 통해서만 존재 조건을 마련하는 구조에선 ‘브라만 좌파’에 주로 속하는 언론과 지식인이 권위를 지니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을 전제하고서도 나는 모든 갈등이 적대적 갈등으로 치환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모든 주제를 본질 환원주의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갈등론의 관점에서 사회는 갈등을 기본속성으로 한다.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경제적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적 갈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그 모순을 둘러싼 적대적 갈등을 양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갈등은 치열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정치적 갈등은 치열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현실에서는 많은 부분 정당을 둘러싼 정치적 ‘진영갈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이런 갈등을 적대적인 갈등으로 확대되지 않고 민주적 프로세스를 통해 조정되고 해결되도록 하는 기제이다. 진영갈등이 적대적 갈등으로 전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한 본질적 위상이기도 하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성숙성은 바로 이 갈등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 내에서 여과되는가하는 것이고, 이 갈등이 최대한 비(非)적대적 갈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나아가 가능하면 목숨을 건 적대적 갈등으로 전개되지 않고, 민주주의적 제도의 틀 내에서 수용되고 여과되도록 하는 것이다. 민주화 30년이 된 지금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해 가야 한다고 할 때, 그를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이 여야 정당에 일체화되어서는 않된다. 여당의 탈갈등화 전략만으로 해소될 필요도 없다.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와 투쟁들을 드러내도록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야당처럼 모든 갈등을 적대적 갈등으로 만들 필요가 없고 거리의 투쟁으로 수렴시킬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런 지향은 민주주의 내에서의 치열한 쟁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치열한 쟁투의 다른 차원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람시적 정신에서 보면, 모든 사안은 계급적이다. 그러나 계급적 본질에도 불구하고 국민적-민족적 헤게모니를 향한 각축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모든 사안은 사회경제적 본질로 환원해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국민적 설득력과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각축이 별개의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원용하면, 치열한 갈등의 현장에서 그것의 양극화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중간지대의 설득과 소통과 설복의 공간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전진할 것인가…일반적 규칙 형성의 관점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한 대안찾기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 첫째, 정치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으로, 민주화 30년의 여야 교대(交代), 보수와 진보의 교대를 반추하면서, 여러 갈등 사안에 대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반적 규칙’을 제정하는 관점에서 접근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김은경 환경부 장관의 산하기관장 사퇴 강제에 대한 1심의 판결은 탄핵에 이르게 한 박근혜의 직권남용의 부분적인 재현인 셈이다. 여기서 야당은 이제야말로 문재인정부가 박근혜 탄핵의 정당성마저 훼손할 정도로 직권남용에 ‘쩔어있다’고 비판하고 박근혜 추종세력 일부는 ‘거봐라’ 박근혜 탄핵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까지 쟁점화한다. 여당의 일부는 당연히 이를 비판하고 사법부를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일반규칙을 만드는 새로운 길을 가 볼 수 있다. 국민의 뜻에 따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을 때, 선거의 민의를 받들기 위해 최소한 인적 교체와 일사분란함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체장과 관료제 공무원 간의 괴리는 커지게 된다. 또 정권이 바뀌면 야당에게도 동일한 딜레마가 재현된다. 이렇게 반복되는 사안, 그리고 자기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 내로남불이라고 비판이 재현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 일반적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정권 교체 이후의 고위 공무원 교체의 범위, 이른바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채용 범위 등을 미국처럼 광범위한 교체 모델에서부터 반대의 모델까지 함께 검토하면서 한국적 일반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야당은 모든 사안을 다 갈등의 주제로 만들지 않아도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세상은 넓고 싸울 일은 많기 때문이다. 정치적 역동성이 표현되는, 정치적 갈등의 형태가 달라질 뿐이다. 

87년 이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교체하는 시기가 도래하면서, 초기에는 여의도 광장에 누가 100만명 이상을 동원하는가라는 경쟁을 했다. 지금의 부패방지법의 관점에서 보면, 수백억원의 불법자금이 투여되는 방식으로 정치적 경쟁을 했던 셈이다. 지금은 정권 교체기에 선거 각축의 형태가 달라져있다. TV토론의 비중도 커져 있고 뉴미디어를 통한 홍보도 중요하다. 그렇다고 여야 간의 정권의 향방을 둘러싼 갈등이 덜 치열해진 것도 아니다. 굳이 수백억 원을 들여 무모한 각축을 하지 않아도 자웅을 겨룰 수 있다. 

국회선진화법이야말로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이 법이 제정되기까지 구비구비 먼 길을 돌아왔다. 사실 국회 내에서 굳이 물리력적 충돌을 하지 않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야당은 의례껏 ‘해머’를 들고 법사위장을 봉쇄하는 식으로 투쟁한다. 심지어 최루탄을 난사하는 투쟁양식도 선택한다. 더 강한 투쟁양식이 전투성의 발휘로 인정되는 갈등양식이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국회선진화법은 야당의 입장에서는 투쟁의 수단을 잃어버리고 재갈이 물려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반대하고, 여당은 언제나 이를 선호했다. 그래서 국회선진화법과 같은 여야 정당들 간의 투쟁양식을 전환하는 법은 통과되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보수 집권당의 주도하에, 야당의 동의하에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었다. 차기 정부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는 조건에서, 그것도 긴 유예기간을 두어 차기 정부하에서 시행된다는 전제 하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정작 한 번의 ‘소란’을 거친 후에야 정착단계에 들어섰다. 즉 이 법이 결국 여당이었던 야당이 2019년 말 선진화법의 처벌을 아랑곳하지 않는 물리력적 갈등을 행하고 그것이 법적으로 기소되거나 의원직 박탈의 위험성을 체감하고서야, 정착단계에 들어섰다. 국회선진화법은 여당에게는 패스트트랙에 부의하고서도 6개월을 기다리는 ‘인내’를 강제하고, 야당에게는 물리력적 봉쇄라는 수단의 ‘포기’를 강제하는 법인 셈이다. 나는 국회선진화법이 옳거나 그르다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야 정당들 간에 갈등할 일은 많고 상호투쟁할 일은 많다. 그러나 모든 갈등을 물리력을 동반한 전투적 투쟁의 형태로 갈등을 행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국회선진화법 이후에도 여야 정당들은 박성민의 표현을 빌면 ‘죽이지 않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2017년 처럼 해머를 들고 싸우지 않아도 시계추는 2020년 야당이 보궐선거에서 선전하는 식도 나타났다. 죽고 사는 투쟁과 갈등의 형태를 취하지 않아도 세상은 넓고 여야간에도 싸울 일을 여전히 많이 있고, 세상은 변화한다. 

사실 민주주의 성숙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은 넓고 싸워야 할 일은 많지만, 이 갈등들 중 더욱 많은 사안들을 제도화된 민주주의적 통로를 통해 갈등이 처리되고, 가능하다면 적대적 갈등형태를 비적대적 갈등형태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회에 불가피한 갈등과 투쟁이 더 ‘평화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언제라도, 민주주의가 열려있지 않고 폐쇄적인 경우, 싸워야 하는 갈등의 의제들이 민주주의적 기제를 통해 해결되지 않고 거리의 투쟁으로 전환될 수 있다. 심하면 그것이 ‘내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런 여지는 언제나 남겨져 있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언론과 지식인의 변화된 역할?

둘째, 언론과 지식인의 중간지대로서의 역할과 공간이 폭넓게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언론과 지식인 주체들도 노력하고 우리 사회도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화 30년이 된 지금에도 민주주의의 이런 측면은 충분히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중간지대로서의 언론과 지식인의 매개적 역할이 중요한데, 오히려 양극화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많다. 즉 언론과 지식인이 오히려 적대적으로 갈등하지 않아도 될 일을 적대적 갈등으로 만들고, 적대적 갈등의 민주주의 제도를 통한 비적대화(非敵對化)를 저해하는 경우도 많다. 언론과 지식인의 진영화, 그리고 진영대립의 바람잡이 역할로의 왜소화가 이런 점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많은 언론의 경우, 매일 프레임 ‘전쟁’을 하며, 다음 정권의 향방에 목을 매달고 어느 편에 소속된 것처럼 사고하고 투쟁하듯 보도한다. 언론도 사실 적대적 투쟁의 치열한 주체가 되어 있다. 선거가 가까울수록, 한국과 같은 대통령제하에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대선이 가까울수록, 적나라해지게 된다. 자신의 주체적인 독립적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서 보도하고 기사를 쓰기보다는, A를 하면 ‘왜 B는 고려 않냐’고 비판하고, B를 하면 ‘왜 A라는 좋은 방안이 있는데 안 하냐’고 보도하는 경우가 많다. 무조건 비판을 위한 비판의 프레임으로 보도하고 논리화하는 것이다. 심지어 때로는 팩트를 교묘하게 왜곡하기도 한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이기도록 하기 위해서 편드는 보도를 한다. 사실 이것은 너무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30년이 된 지금 더욱 악화되어 있다. 

언론과 지식인 스스로가 적대적 갈등의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주체적 행위자가 되어 갈등에 참여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증폭시키게 된다. 일부 언론은 또 자신들의 ‘정략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지식인 풀 중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지식인을 ‘동원’한다. 그러다 보니 지식인은 ‘도구화’되고, 사안을 보는 양극화적 시선은 더욱 강화되어가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갈등이 ‘집단 패싸움’이 되는 것을 언론과 지식인이 촉진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권위주의 시대와 민주화 시대에 중간지대로서의 언론과 지식인의 공간이 상당히 큰 규모로 존재하였다. 민주화 30년이 된 지금 이른바 ‘98년 체제’ 하의 신자유주의화의 흐름 속에서 사회경제적 모순과 양극화된 현실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과 적대적 투쟁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중재하고 때로는 한편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동하기도 하고,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국민에 대한 중립적 설득력을 갖는 언론과 지식인의 공간이 확대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치열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사회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계급계층 구조에서 두터운 중간층이 필요하다고 하듯이 중간지대가 두텁게 존재해야 하는데, 역으로 중간지대로서의 언론과 지식인의 붕괴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사회경제적 모순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치열한 사회경제적 투쟁과 치열한 정치적 대립의 양극화된 현실 속에서, 언론과 지식인이 ‘바람잡이’로 전락해가면서 발생하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현실의 양극화된 정치적 대립과 사회적 투쟁의 바람잡이로 작동하며 지식인은 대립과 투쟁을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대리인으로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갈등의 비적대화의 방향이 아니라 적대적 갈등화를 촉진하게 된다.

예컨대 일부 지식인들은 초기에 조국을 둘러싼 진보진영의 도덕적 흠결을 비판하였다. 나는 일정 부분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는 만악의 근원이 문재인정부라고 하면서 오히려 갈등이 ‘집단 패싸움’처럼 강화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한다. 문재인정부는 완전 선일 수도 없고 완전 악일 수도 없다. 진보적 지향을 갖는 현실정부이다. 그리고 많은 문제들이 있다. 나도 ‘왜 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도 많다. 그런데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의 음모론적 배후로 문정부를 표현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나는 이전에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바 있다. 그때 시민단체가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하게 존재하였다. 90년대 중반 시민단체의 ‘정치적 중립성’, 그리고 그에 기반하여 기성 정치와 기업의 비합리성에 대한 비판은 국민들의 도덕적 준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세상은 많이 변화하였다. 민중의 지민화현상도 나타났다. 그리고 치열한 갈등의 현장에서 적대적 대립의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일부 언론과 지식인이 바람잡이 역할과 즉자적인 정당화의 대리인으로 왜소화되는 유혹이 시민단체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산전수전’을 경험한 국민들은 시민단체의 정치적 중립성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90년대의 정치적 중립성 원리가 액면 그대로 작동하지 않더라도, 2020년대 한국사회에서 변화된 형태로 치열한 갈등의 현장에서 정당들의 정파성에 휘둘리지 않고 미래대안적 관점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중간지대로서의 역할을 부단히 새롭게 확대‧확보해갈 필요가 있다. 조국 사태로 각종 민주화 단체에서도 친조국이냐 반조국이냐의 균열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원심력에도 불구하고 중간지대로서의 구심력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확대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넓고 갈등할 일은 많은데, 굳이 적대적으로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안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론과 지식인의 마인드와 스탠스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 언론의 경우-정말 오랜 지적이기도 한데-언론은 스스로가 권력 운영자 혹은 국가경영자라는 인식을 버리는 마인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미 민주화 30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진보정부가 성립한다고 보수언론이 손해보는 것도 없고, 보수정부가 성립한다고 진보언론이 손해보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 단지 언론의 관성과 언론인들의 잘못된 국가권력 ‘주인’의식이 관성적으로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언론은 야당적 스탠스를 가질 때 더 비판할 것이 많고 보도할 거리가 많다. 

아니면, 아예 언론의 숨겨진 정파성을 투명한 것으로 공표하게 하는 식의 일반규칙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언론이 선거 국면에서 자기 지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미국에서 뉴욕타임스 등 주요언론이 자신들의 지지 후보를 밝히는 것도 많이 거론된 대안이다(선거국면에서 지지후보를 밝힌다고 비선거국면에서의 보도가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 치부되지 않게 하는 장치를 하면서 말이다). 

더 문제는 언론과 지식인이 상호작용하면서, 세상은 넓고 갈등할 일은 많은데 더 많은 영역을 갈등의 영역에 넣고 더구나 그것이 적대적으로 작동하게 한다는 점이다. 언론은 자신들의 숨겨진 정파성에 맞는 지식인을 동원하여-물론 기자들 자신이 지식인이며 지식인적 글쓰기를 한다-양자가 상호작용하면서 갈등의 적대화를 촉진한다. 사회경제적 모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증폭시켜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타당하며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파성이 작동한다. 하나의 언론이 집권세력에 반대하는 야당적인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경우, 언론으로서의 균형감을 가지고 비판하고 대안을 추구하기보다는, 비판 자체가 목적이고 정권 비판으로 수렴될 수 있는 사안을 확대보도함으로써 정권에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A와 B의 선택지가 있을 때 사회경제적 모순의 해결을 위해, 그리고 우리 사회의 대안적 발전을 위해 어떤 안이 좋은가라는 관점보다는, 비판이 목적인 경우가 많다. A의 방향으로 가면 B로 안간다고 비판하고, B로 가면 A로 안간다고 비판한다. 대부분의 갈등에서는 상반된 입장을 갖는 주체들이 많기 때문에 그 각각의 보도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갈등주체와 지식인은 많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정파성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선택적으로 동원하게 된다. 이것은 갈등의 불필요한 적대화와 소모적 갈등으로의 전환을 촉진하게 된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양비론과 양시론

이런 점에서 나는 다음으로, 언론과 지식인이야말로 적대적 갈등의 사안에 대해서-고전적인 표현을 빌면-30% 정도는 ‘양시론’적 입장과 ‘양비론’적 입장을 복원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사실 ‘진실은 회색이다’라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지금도 여진이 있는 이른바 조국 사태가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조국 사태를 둘러싼 진영 간 대립도 양극화의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친조국과 반조국으로, 공간적으로는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뉘어 투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여기에 결합하여 함께 투쟁하는 지식인도 많고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중간지대로서의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도 있어야 한다(중간지대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나는 ‘7대 3법칙’을 말하고 싶다. 모든 진영대립을 없애려는 것은 나이브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진영대립으로 환원해서 보는 것도 동시에 나이브한 것이다. 치열한 정치적 각축의 국면일수록 더 불가피하다.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중간지대로서의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도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즉 갈등의 성격을 10 대 0의 천사 대 악마의 대립으로 간주하는 양극화된 현실 속에서, 비록 7(70%)은 한 쪽의 입장에 서더라도, 3(30%)는 ‘역지사지’의 스탠스로 바라보는 중간지대가 존재해야 한다. 조국을 옹호하는 사람도 강남좌파의 내부에 있는 30%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정부의 ‘입학사정관제’의 초기에는 바로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기성체제 내에서의 상층이 다양한 교육자원을 동원하는데 있어서 현저한 특권을 관행적으로 누려왔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한 입시 공정성의 훼손 때문에 도전을 받았고 지금은 많은 개혁이 된 상태에서 수시의 일부 기제로 존속하고 있다. 바로 그렇게 국민적 지탄을 요구받아 개선이 될 제도 틀 내에서 조국과 같은 교육자원의 특권적 동원은 편만한 것이었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도, 반조국의 서 있는 사람들도-조국을 비판하면서도-조국처럼 ‘털리면’ 남아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나도 조국처럼 털리면 조국이 당하고 있는 것의 50%는 동일할 것이라는 자기반성적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우리 편은 ‘있는 30%’도 불가피성으로, 그리고 관행으로 혹은 반대편의 음모론으로 정당화하고, 100% 순수주의적 입장에서 돌진하고 글을 쓰고 말하였다.
  
이 점에서 중간지대로서의 언론과 지식인이 양시론과 양비론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나는 위장된 정파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70%는 자신의 정파성을 갖되, 30%는 양시론과 양비론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한 기반이 확대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함을 향해 전진하기 위해 바로 언론과 지식인의 재정립된 역할이 필요하다.

중간지대로서의 언론과 미디어의 위상 재정립은 정보의 편향적 제공과 공유로 인하여 자기확증 편향이 강화되고 있는 작금의 뉴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주지하다시피, 유튜브나 기타의 플랫폼에 의해서 제공되는 정보가 기본적으로 선호(preference)와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선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공되기 때문에(나는 이 점에서 플랫폼 알고리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개인의 신념과 시각을 상대화시켜 주기 보다는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공된다. 여기에 최근에는 SNS 상에서 유사한 신념과 시선을 갖는 사람들로 단톡방이 결성되어 신념과 시각의 ‘끼리끼리’ 효과가 강화되게 되어 있다. 최근에는 단톡방에 하나의 왜곡된 정보나 기사, 글이 공유되는 경우 단톡방 전체의 구성원들의 자기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하나의 정보가 유통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과거와 달리 균형을 잡아주는 기제가 구조적으로 부재하게 된다. 

이런 뉴미디어의 새로운 조건에 의해서 강화되고, 지식인과 언론이 이러한 바람잡이 역할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세상은 넓고 갈등할 일은 많은데, 이 갈등이 양극화적 갈등이 되고 극단화되게 된다는 것이다. 싸울 일은 많으니, 가능한 민주주의의 개방성 속에서 여과시켜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된다. 

민중의 지민화를 고려해야

이런 중간지대의 회복,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의 중재자적 위치는 김종영 교수가 ‘지민의 탄생(휴머니스트, 2017)’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면 ‘민중의 지민화’ 시대에 부응하는 것이고 언론과 지식인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민중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식인 수준으로 대단히 ‘똑똑해져’ 있다. 정치와 관련해서 보면 오랜 반독재의 정치적 경험, 민주화 30년의 경험으로 인하여, 한국의 많은 국민들은 ‘정치 9단’적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 둘째 형은 택시운전을 한다. 코로나 국면이야 다르겠지만, 택시를 하면 승객과 많은 대화를 하니, 더 정보가 많다. 거기에 자기 시각까지 섞어, 명절에 이야기하다 보면, 나보다도 더 정치의식이 놓고, 정치에 대한 제언도 많다. 민중의 지민화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일부 언론과 지식인의 글은 선전보다는 ‘선동’에 가까운 글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예컨대 70-80년대 우리가 군부독재와 싸우면서 사용했던 파시즘, 파쇼, 전체주의라는 언어가 스탈린, 북한, 히틀러체제에서부터 현재의 문재인정부에까지 적용하듯 사용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설득력이 자기 지지집단에서는 투쟁의 열정을 불태우는 식으로 설득력이 있지만, 그 설득력이 지지집단의 경계를 넘어 확산되지도 않는다(문재인 대통령의 40% 대의 지지율 유지도 나는 이런 식의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똑똑해진’ 민중에 대응하여, 지식인과 미디어가 꼭 그만큼 그 똑똑함을 넘는 심도있는 정보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람잡이’형으로 양극화된 언론이, 그리고 단순한 지적 정당화의 대리인으로 지식인이 활동하게 되니, 설득력이 오히려 약화되게 된다. 과거형의 정파적 중립성을 ‘위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파성을 담지하는 방향으로 보도하고 프레임 전쟁을 하는 것을 일반 대중들도 잘 꿰뚫어 알고 있다. 대중들이 그 이중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도, 더 중간지대로서의 설득력이 약화되는 역설이 성립한다(신문언론의 영향력의 하락도 나는 이런 배경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자기확증 편향’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뉴미디어 환경 속에서 자기확증을 유연화하고 상대화해주는 기제가 부재하다. 자기확증 편향에 빠진 분은 반대정보 자체를 거부해버리기도 한다. 사회의 여론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중간자적 위치에서 그 과정을 합리화해주는 역할이 부재하다보니, 사회의 ‘의견 동호인회’화 현상이 강화되고, 그러다 보니 더 양극화된 현실은 강화되게 된다.

프로보커터 시대 언론의 극단화

최근 김내훈 씨의 ‘프로보커터(서해문집, 2021)’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그들을 결집해 우리를 결집하는 자들’이 바로 프로보커커인데, 일부 언론이 바로 프로보커터적인 지식인을 통하여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십자군 전쟁처럼 만든다. 때로는 음모론으로, 때로는 막말과 도발로, 때로는 왜곡된 분노를 증폭함으로써, 공론장이 양극화되도록 기여한다. 전통 언론이 이른바 프로보커터의 극단의 언어 뒤에 숨어 의견의 양극화를 방조하거나 촉진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의견을 대중화하는데 활용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각자가 적을 이기는 데는 성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최소한의 공존의 기반을 파괴하고 양극화를 촉진한다. 나는 사회경제적 자원을 둘러싼 균열과 대립, 그것에 기반하는 정치적 경쟁이 존재하는 한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정도의 적대성을 갖으면서 갈등하는가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3족을 멸하는’ 정파 갈등을 했다. 해방 후 60~70년대에는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이단자를 ‘죽이는’ 갈등을 했다. 80년대 이후 민주화과정에서는 이러한 적대성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필요 이상의 적대성을 담은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나는 앞서 지적하였듯이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이 적대적인 ‘집단 패싸움’과 같은 방식으로 갈등이 전개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안부터라도 차분하게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고 합리적으로 결정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래도 치열하게 싸울 일은 많으니까 말이다. ‘똑똑해진’ 국민 앞에서 국민을 계몽의 대상이나 바보로 간주하고 바람잡는 것 역시 이미 시효를 다했다. 오히려 중간자적 입장에서 정보를 주고 국민들이 판단하게 하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다원성 존중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계, 87년 이후 체제의 모습은 다원성 존중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민주시민교육의 새로운 차원으로 ‘다원성 존중 교육’을 고민하고 있다. 미래세대의 교육을 책임진 입장에서의 이야기이다. 나는 진보적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비판적 사고라는 것이 진보적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비판적 사고는 보수적 사고를 물리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비양시론적 입장에서 다양한 입장들에 거리를 두면서 균형잡힌 사고를 하고 스스로 주체적 판단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자기 삶의 문제와 모순에 대해서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미래세대를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과 입장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전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상 정치학자들은 광의의 민주화 과정을 자유화, (협의의) 민주화, 다원화로 나눈다. 권위주의 시대를 넘어 부분적인 정치적 자유와 자율을 허용하는 단계로서의 자유화와 본격적인 선거민주주의의 도입 등이 시작되는 민주화의 단계가 있고 그 이후에 다원적인 정당들과 다양한 사회적 부분들이 경쟁적으로 존재하며 국가-시장-시민사회의 다양성과 다차원성이 존재하게 되는 다원화의 단계로 구분한다. 나는 다원화에도 주도하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진보적 다원화와 보수적 다원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원화의 단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통상 미국식 정치발전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어 비판받지만,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 다원성이 존중되는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은 민주화의 어느 단계에서는 일반적 특성이 된다고 생각하고, 한국에서도 이런 투쟁과 갈등이 지배적이지만, 그 속에서도 다원성을 전제로 한 공존의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사회가 발전할 일도 많고 그래서도 수많은 투쟁과 갈등이 존재하지만, 모든 사안을 천사 대 악마의 구도, 절대악 대 다수시민의 구도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런 인식의 일면성이 우리 사회가 공존사회로 가는 큰 흐름에 중대한 장애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시민의 인식틀이 다원성과 다양성을 품어내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미래세대를 향한 민주시민교육의 새로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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