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100조 원(800억 달러) 규모의 미군의 군사 자산을 획득했다는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100조 원이라는 규모는 사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언론, 탈레반 미군 100조 원대 무기 입수 보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하면서 100조 원대(8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군의 무기를 탈레반이 입수했다며 이를 제목에서부터 강조한 기사가 주요 언론을 중심으로 나왔다. 이 같은 보도는 탈레반이 미군의 무기와 장비를 활용하는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다시 이어지고 있다. 관련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100조 장비 다 버린채…美, 하루 앞당겨 아프간 떠났다(매일경제)
미국 아프간에 부은 '100조 군사자산' 탈레반 손아귀로(연합뉴스)
탈레반, 아프간에서 97조원 어치 미군 무기 '줍줍'(경향신문)
美 20년간 아프간에 쏟아부은 ‘100조’ 탈레반 품으로(헤럴드경제)
탈레반, 美가 두고 간 100조원 장비로 재무장… 블랙호크도 띄워(조선비즈)
미국이 쏟아부은 100조원 무기, 탈레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갔다(서울신문)

이들 기사는 AP통신 보도와 이를 시인한 백악관의 입장을 전하며 탈레반이 100조 원 대 군사자산을 입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합뉴스는 “지난 20년간 미국이 아프간에 쏟아부은 100조 원 상당의 군사자산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의 손에 들어가게 됐다고 백악관이 밝혔다”며 “AP통신도 미국이 20년 동안 아프간 정부군에 제공한 830억 달러(97조 원 상당) 규모의 무기를 탈레반이 노획했다고 보도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역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7일 브리핑에서 ‘우리 군사 물품 상당수가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다’고 했다”며 “탈레반이 노획한 군사 물품은 미국이 아프간 정부군에 제공한 830억달러(약 97조 원) 상당의 무기라고 AP통신이 전했다”고 보도했다.

AP통신 원문, 무기 아닌 ‘전체 지원 규모 100조 원’ 명시
백악관 보좌관 발언도 인용 왜곡

한국 언론이 인용한 AP통신의 원문 기사를 보면 인용 내용과 달리 ‘830억 달러 규모의 무기를 탈레반이 노획했다’는 대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AP통신은 “20년 동안 830억 달러를 들여 조직하고, 훈련시킨 아프간 정부군이 순식간에 붕괴돼 미국이 공급한 화력을 탈레반이 장악했다”고 보도했다. 즉 100조 원 규모(830억달러)는 미국이 아프간 정부군에 지원한 유·뮤형의 전체 투입 규모를 뜻하는 개념으로, 탈레반이 노획한 무기 규모가 아니다. 한국 언론 가운데도 AP통신 기사를 원문 그대로 번역해 ‘투자액이 830억 달러’라고 보도한 경우가 있었지만, ‘100조 원 노획’을 제목에 쓴 언론이 많다 보니 이 같은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100조 원 규모의 군사 자산이 탈레반에 넘어갔다는 발표를 했다는 내용도 사실과는 다르다.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8월 17일 제이크 설리번 보좌관의 브리핑 질의응답 전문을 보면 제이크 설리번 보좌관은 “우리는 모든 군사 물자가 어디로 갔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상당수는 탈레반에 넘어갔다”고 밝혔을 뿐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기자가 액수를 추산해 질문하긴 했지만 수십억 달러 규모를 전제한 질문으로 구체화된 액수가 아니었다.

국내 언론이 AP통신 보도를 오역해 인용한 대목과 미군 무기의 상당수가 탈레반에 넘어갔다는 제이크 설리번 보좌관의 해당 발언을 나란히 배치하고, 언론 간 인용이 이어지면서 백악관에서 무기 등 군사자산 액수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

▲ 백악관 브리핑 질의응답 내용
▲ 백악관 브리핑 질의응답 내용

또 다른 질문에 제이크 설리번 보좌관은 수천억 달러 규모를 언급하며 “엄청난 양의 병력을 훈련시키고 조언을 주고, 도움을 줬다”고 발언한 내용이 있다. 이 역시 무기 규모나 군사 자산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AP통신·워싱턴포스트 등 이미 ‘거짓’ 판정

AP통신·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언론사들은 팩트체크 기사를 통해 ‘100조 원대 규모’의 무기가 탈레반으로 건네졌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검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탈레반은 850억 달러의 미국 무기를 입수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팩트체크’ 기사를 냈다. 워싱턴포스트는 “장비의 가치는 800억 달러를 넘지 않는다. 이는 20년 동안 아프간 군대를 훈련하고 유지하는 데 지출한 모든 돈을 합한 수치”라고 했다. AP통신은 전문가를 인용해 “그 자금에는 20년 동안 장비 및 운송과 함께 병력 급여, 훈련, 운영 및 기반 시설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 워신턴포스트 팩트체크 기사 갈무리
▲ 워싱턴포스트 팩트체크 기사 갈무리

AP통신과 워싱턴포스트는 실제 무기에 들어간 비용은 800억 달러의 3분의 1에 못 미치는 240억 달러로 추정하면서도, 탈레반이 입수한 무기의 액수는 이보다도 크게 낮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총액에서 장비에 대한 내역은 최대 240억 달러이지만 탈레반이 손에 쥐고 있는 장비의 실제 가치는 아마 이 금액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도중에 파손된 경우가 적지 않고 미군이 항공기를 비무장화하는 등 전력으로 쓰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

▲ ⓒ연합뉴스
▲ ⓒ연합뉴스

AP통신 역시 “많은 군사 장비는 수년 동안 사용하면서 쓸모가 없어졌을 것이다. 또한 미국 중부사령부 프랭크 맥켄지 사령관에 따르면 미군은 이전되지 않는 낡은 장비를 폐기했으며 최근 수십대의 험비와 항공기를 무력화시켜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됐다고 한다”고 전했다.

미국은 소셜미디어와 트럼프, 한국은 언론이 허위정보 확산

미국에서는 팩트체크 대상이 되는 허위정보가 어떻게 퍼지게 된 걸까. 한국 언론 보도와 달리 AP통신과 백악관에서 100조원대 군사 자산이 넘어갔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으니 이를 검증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AP통신은 팩트체크 대상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입장문과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의 게시글로 규정해 검증했다.

AP통신은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탈레반의 새로운 무기’가 850억 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입장문을 통해 ‘모든 장비는 즉시 미국으로 반환되어야 하며 여기에는 850억 달러의 비용이 포함된다’고 썼다”고 설명했다. 워싱턴포스트 역시 우파 소셜미디어들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입장문을 검증 대상으로 지목했다.

▲ 페이스북 갈무리. 페이스북은 제휴사인 AP통신의 팩트체크 결과를 인용해 해당 게시글이 거짓을 포함하고 있다는 문구를 띄우고 있다.
▲ 페이스북 갈무리. 페이스북은 제휴사인 폴리티팩트의 팩트체크 결과를 인용해 해당 게시글이 거짓을 포함하고 있다는 문구를 띄우고 있다.

현재 미국 페이스북에 올라온 관련 게시글에 접속하면 팩트체크 결과 ‘일부 거짓’으로 드러났다는 안내문이 함께 뜬다. 페이스북과 제휴를 맺은 폴리티팩트의 팩트체크에 따라 소셜미디어에 퍼지는 허위정보에 이를 고지한 것이다. 

미국이 투입한 금액이 100조 원 가량이라는 내용이 탈레반이 입수한 무기 등 군사 자산 내역으로 와전될 수는 있다. 미국에서도 기사 내용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주요 언론사들이 소셜미디어 속에서 와전된 내용을 검증한 반면 한국의 주요 언론사들은 와전된 내용을 퍼뜨리고 있다는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포털 뉴스 팩트체크’ 기사는 방송통신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미디어오늘은 포털 속 주목 받은 뉴스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포털 뉴스 팩트체크’를 하고 있습니다. 관련 제보는 teenkjk@mediatoday.co.kr로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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