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기자들이 1년간 콘텐츠 관리 도구 ‘아크’를 사용한 소회를 밝혔다. 기자들은 “아크 도입 후 오히려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이 전무한 수준이다. 온라인 기사질이 좋아졌는지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아크는 미국 워싱턴포스트(WP)사가 개발한 AI 콘텐츠 관리 도구 ‘아크 퍼블리싱’(Arc publishing·이하 아크)을 말한다. 아크는 전 세계 22국 언론사가 활용하고 있는 도구라고 한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9월 사보에서 아크에 대해 “사진과 동영상을 자유자재로 첨부하고, 페이스북·인스타그램·유튜브 게시물을 원본 그 자체로 보여줄 수 있다. 클릭 한 번으로 뉴스에서 다른 뉴스, 다른 사이트로 이동하면서 기사의 맥락과 흐름도 잡아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조선일보는 ‘아크’ 시행 하루 전인 지난해 8월31일 홈페이지 광고를 통해 자사가 “디지털 뉴스 트랜스포머”라며 홍보했다.
▲조선일보는 ‘아크’ 시행 하루 전인 지난해 8월31일 홈페이지 광고를 통해 자사가 “디지털 뉴스 트랜스포머”라며 홍보했다.

조선일보 노동조합(위원장 김인원)은 아크 도입 1주년을 맞아 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지난 2일 노보를 발행했다. 조선일보의 A기자는 노보에서 “‘아크를 왜 도입했나’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던 한 해였다. 기사 작성과 사진 전송 방식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초기 잡음이 사라졌지만 불편함이 사라진 게 아니라 불편함에 익숙해진 결과”라고 운을 뗐다.

아크 도입 후 오히려 콘텐츠 제작이 약화됐다고도 지적했다. A기자는 “WP는 아크를 도입하면서 기자와 엔지니어, 그래픽 디자이너 협업으로 ‘멀티미디어 패키지’를 적극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WP 기자 수는 크게 늘었다. 우리는 어떤가? 콘텐츠에 쓸 썸네일 이미지 하나 제작하는데도 편집팀 도움 하나 받기 어렵다. 아크 없는 타사들이 오히려 자체 개발진을 꾸려 WP와 같은 멀티미디어 콘텐츠 생산에 주력 중인데, 우리는 오히려 아크 도입 후 이런 콘텐츠 제작이 전무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저급하다고 평가받는 기사들이 더 많아졌다고도 비판했다. A기자는 “아크 도입은 디지털 강화 정책에서 우리의 정체성 전환을 명확하게 보여준 기점이라 생각한다. 변화하는 언론 환경을 발 빠르게 쫓아가겠다는데 이견이 없지만, 꼭 아크여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크 도입 후 ‘이렇게까지 저급하게 가야하나’ 회자되는 기사들이 더 많아졌다. 그런 기사들이 ‘많이 본 뉴스’ 상위 10위권에 꼭 들어가 있는 걸 발견할 때마다 참담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저널리즘 가치를 지키면서도 좋아할 만한 기사를 만드는 게 중요한데, 어렵다고 외면하고만 있는 것 아닌가”라고 우려했다.

조선일보의 B기자도 “온라인에서 기사 하나 출고하는 데 필요한 ‘클릭’이 몇 번 늘었는지, 기사에 사진·동영상 붙이는 게 얼마나 번거로워졌는지, 이런 점을 감수할 만큼 온라인 기사질이 좋아졌는지 당장 네이버에 접속해 우리 회사 메인 기사들을 살펴보면 답은 명확하다”고 꼬집었다.

조선일보의 C기자 역시 “우리의 디지털 전환은 ‘조선닷컴의 온라인 커뮤니티화’인 것 같다. 유튜브에서 나온 영상을 따서 조회 수를 올리고, 자살 시도를 한 전직 아이돌 멤버 인스타그램을 중계하는 것이 기사 가치가 있나. 1년 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조선닷컴이 이렇게 꾸려져 나가는 게 안타깝다. 디지털 전환 후 업무 부담은 늘어났지만, 늘어난 업무량보다 치밀한 전략과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듯한 회사의 디지털 전환 방식이 더 실망스럽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의 D기자는 “아크에 ‘데이터 분석 툴’이 있다고 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데이터 분석은 없고 그저 ‘온라인 빨리 처리하라’는 소리만 반복한다. 도레미도 잘 모르는데 뱅앤올룹슨 스피커 갖다 놓으면 뭐 하나. 취재기자에게 채찍질을 가할 거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조선일보의 E기자는 “아크 도입했으면, 인터넷 강화하기로 했으면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 온라인 중심으로 가기로 해놓고, 인력을 늘리지도 않으면서 기존 신문 51·52·53판을 다 찍는 건 모순이다. 아크를 ‘더하기’ 했다면 52판은 지금의 53판처럼 정말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고 기존 53판은 없애는 식으로 ‘빼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이기레기’ 사이트 등장에 회사 “로펌에 법률 자문 중”

‘마이기레기닷컴’ 사이트가 등장했다. 그동안 정부·여당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따로 분류해 비판하는 사이트가 있었지만, 이 사이트는 기자에 대한 뒷조사를 예고했다. 이 사이트에서 순위를 매긴 상위권 1위~10위 중 상당수는 조선일보 기자들이라 노조는 우려했다.

노조는 노보에서 “기사가 아닌 기자를 직접 노린 인신공격에 우리 조합원들이 노출됐다. 다른 회사보다도 우리 회사 기자들이 주로 공격 타깃이 된 상황이다. 문제가 된 인터넷 사이트에는 우리 회사 기자 대부분의 프로필이 게시됐고, 멋대로 도용한 사진과 함께 모욕적 게시글과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 사이트에 과거 사진들이 줄줄이 게시된 한 조선일보 기자는 “기사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얼마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기자로서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저열한 인신공격과 조롱은 분명히 선을 넘은 것”이라고 했다. 성적 모욕까지 달린 한 여성 조선일보 기자는 “나 혼자서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가족 친구들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웃어넘길 수 없다”고 했다.

노보에 따르면 조선일보 측은 이번에 문제가 된 사이트와 관련해 기자 개개인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로펌에 법률 검토를 의뢰하는 등 대응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노조에 밝혔다. 10년차 이상의 한 조선일보 기자는 “기사가 아닌 기자를 직접 겨냥해 모욕하고 비난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고 전처럼 ‘무시하라’는 말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다. 기자 개인이 일일이 대응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회사가 대책을 마련해 조합원들에게 공지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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