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협회가 올해 방송의 날을 맞아 공모를 열어 대상으로 뽑은 표어는 ‘온 에어(ON AIR), 세상을 켜는 불빛입니다’이다. 이에 “그 불빛은 등잔불인가? 왜 자기 자신을 밝히지는 못하는 건가? 방송의 날은 정말 정규직 방송인의 날로만 생각하는 것인가”라는 반문이 나왔다. 

최근 대구MBC 비정규직 종사자들은 ‘자리’가 사라졌다. 회사가 사옥을 이전하면서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직원 외 종사자들의 책상을 모두 뺐다. 원래 자기 업무 자리가 있던 이들이었다. 대구MBC에도 MD부터 CG 디자이너, 사무직까지 여러 직군에 걸쳐 ‘무늬만 프리랜서’ 위법 논란이 있다. “근로자성 주장할까봐 이런 졸렬한 행동을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 작가가 1년 차 작가 시절 겪은 방송의 날은 충격이었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사무실에 불도 꺼졌고, 프리랜서 작가를 빼곤 정직원은 아무도 출근하지 않아 조용했다. 방송사 직원에겐 방송의 날은 휴일이었다. “전현직 방송인의 화합과 노고를 기리는 날이라는데, 이 방송인엔 작가를 비롯한 비정규직은 없었다.”

모두 방송의 날인 3일 오전 11시 서울 상암동 MBC, YTN, CJ ENM 등 방송사들이 밀집한 상암 문화 광장에서 나온 말이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주최로 열린 ‘방송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 권리 선언’ 기자회견 현장이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전국영화산업노조, 언론노조와 산하 방송작가지부 등이 참여했다. 

▲3일 오전 11시 서울 상암 문화 광장에서 ‘방송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 권리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3일 오전 11시 서울 상암 문화 광장에서 ‘방송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 권리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김기영 방송스태프지부장은 “부정부패와 불법을 기념하는 날이냐”고도 물었다. 방송사들이 제작 스태프들에게 근로계약서 미작성, 주 52시간 노동 제한 위반 등으로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김 지부장은 “방송사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법을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또 대놓고 무시한다”며 “말뿐인 제작 자회사를 만들어 책임을 회피하고, 제작비를 올려주지 않으면서 제작사들에게 알아서 노동시간을 채우라고 요구한다”고 비판했다. 

김한별 방송작가지부장도 “방송인들의 노력을 격려하고 창작의욕 고취시키려면, 세금만 낭비하는 허울뿐인 행사 대신 제대로 된 방송 노동 현장 만드는 데에 방송사가 앞장서야 한다”고 밝혔다. 

방송작가지부는 최근 KBS, MBC 등 방송사에 교섭을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아직 마땅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김 지부장은 “교섭 요구안은 다른 게 없다. 방송작가 임금테이블 만들어달라, 계약서 제대로 쓰자, 지역 작가 차별 말라, 비정규직 처우 개선 기구 만들어라는 것”이라며 “이런 기본적인 요구도 못 받아들이면서 공정방송, 공정언론, 방송의 날 운운할 자격 없다”고 비판했다. 

방송 비정규직 노조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동 행동을 모의 중이다. 먼저 영화노조와 방송스태프노조의 연합이다. 영화와 방송은 근무지만 다를 뿐, 콘텐츠 제작이라는 면에서 업무 내용이 거의 같다. 종사자들도 영화계와 방송계를 넘나들고, 넷플릭스 등 OTT산업이 발달로 그 경계는 더 희미해지고 있다. 현장에선 두 노조가 연합해 방송·영화사업자 모두와 공동교섭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낀다. 

박찬희 영화노조 위원장은 “영화노조는 영화사업주를 상대로만 단체교섭을 할 뿐, 방송사업주를 대상으로 단체교섭을 하지 않았지만 더이상 조합원의 노동환경을 저하시키는 방송제작현장을 묵과할 수 없게 됐다”며 “방송스태프지부와 함께 노동조합법에 따라 대표교섭단을 구성해 단체교섭을 단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영화계에 오래 몸담았던 박 위원장은 실제 최근 방송 제작일을 맡으려다 계약이 무산된 적이 있다. 영화계는 영화노조 등의 투쟁을 통해 근로계약서 작성이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2020년 기준 제작현장의 84%가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다. 박 위원장은 해당 드라마 제작사에 근로계약을 요구했고, 계약은 없던 일이 됐다.  

시민단체들과의 연대체도 늘고 있다. 언론노조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전태일재단, 노회찬재단, 서울노동권익센터, 마포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 등과 미디어업계 비정규직 노조 설립을 장기적 과제로 둔 ‘미디어비정규직공동사업단’을 꾸렸다. 이들은 먼저 ‘방송작가친구들’이란 이름으로 방송작가 현안에 집중해 활동을 시작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희망을 만드는 법, 언론개혁시민연대, 문화예술노동연대, 방송스태프지부 등도 미디어업계 비정규직 현안에 대응하는 공동행동 기구를 꾸려 논의를 진행 중이다. 

김기영 지부장은 이와 관련 “처음 순서로 KBS에서 제작 중인 모든 드라마에 대한 고발을 진행하겠다. 단발성 보여주기가 아닌, 실제로 변화가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울 것”이라며 “오는 9~10월 KBS가 방영한 드라마 현장 7곳을 근로계약성을 작성하지 않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지 언론노조 특임부위원장은 “‘왜 빨리 가지 않느냐, 멀리 가지 않느냐, 왜 큰 걸음 가지 않느냐’는 지적들, 너무 잘 알고 있다. 언론노조도 뚜벅뚜벅, 쉬지 않고 이 길에 앞장 서겠다”며 “함께 연대하고 힘을 합쳐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 방송의 날은 정규직, 비정규직이 아니라 방송 만드는 모든 이의 생일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전국의 방송-미디어 비정규직‧프리랜서 노동자 일동’ 명의로 ‘노동자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방송사·제작사를 향해 △표준근로계약서 의무화 및 ‘무늬만 프리랜서’ 시도 전격 중단 △주 52시간 노동 철저히 준수 △건강권 보장 및 노동 안전 강화 △일터 괴롭힘 근절 △여성·아동·성소수자·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 금지 대책 마련 △프로그램별 노사 협의체 의무 설치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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