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는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반지원정대 여정이 등장한다. 등장인물 모두 절대반지를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를 파괴하긴 쉽지 않았다.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이들은 여지없이 절대반지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 고리를 끊어야 하는 걸 알지만, 막상 내 것이 되면 욕심이 생기고 마는 그것.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둘러싼 지난한 논의는 마치 절대반지를 둘러싼 싸움과 같았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주요 담론 중 하나는 ‘공영방송 정상화’였다. 시민들은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을 통해 공영방송의 독립성 확보를 주장하며 시민 품으로 공영방송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 뒤로 35년이 흘렀건만,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는 아직도 해소되지 못했다. 야당이 주도적으로 방송법 개정을 추진하면 여당이 미온적 태도를 보이며 무산시키는 일이 수없이 반복됐다. 이러한 태도는 진영을 따지지 않고 벌어졌다.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 여야 처지가 바뀌며 또다시 지지부진한 공방이 이어졌다. 공영방송을 수중에 놓은 정치권력은 절대반지를 얻은 듯 행동하기 일쑤였다.

논의가 길었던 만큼,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도 이미 나와 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영방송 이사진 구성에 사실상 임명권을 행사하는 국회의 권력 남용을 줄이고 그 자리에 국민이 관여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KBS ‘저널리즘토크쇼 J’ 에 출연했던 고(故) 이용마 MBC기자.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국민이 공영방송 사장을 선출하는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했다. 사진=저널리즘토크쇼 J 갈무리
▲ KBS ‘저널리즘토크쇼 J’ 에 출연했던 고(故) 이용마 MBC기자.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국민이 공영방송 사장을 선출하는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했다. 사진=저널리즘토크쇼 J 갈무리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시민이사제 도입, 공영방송 인사추천위원회 설치 등 제도는 정치권력 개입을 견제하고 시민이 직접 이사를 뽑는 대안들이다. 이는 전문성 없이 정치권력에 로비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시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공영방송에 대한 비전을 지닌 이들이 이사진으로 구성돼야 한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이러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논의가 바로 지금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진영 논리가 사회를 분열하고 독자마저도 ‘내 편 드는’ 해장국 언론을 찾는 이때, 어느 편도 들지 않고 공정한 담론을 제시하는 공영방송 존재는 필요하다 못해 절실하다. 언론중재법을 중심으로 한 언론 개혁과 관련한 논의에 공영방송 지배구조 논의도 함께 이야기돼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정치권력과 분리되지 못하고 언론 또한 정치의 ‘플레이어’가 돼버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공영방송에나마 정치적 회색지대를 마련하려는 것은 ‘언론의 과잉 정치화’에 실망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최승호 전 MBC 사장도 얘기했듯 “건강한 공영방송은 한 사회의 인프라나 다름없다”.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운 건강한 공론장을 건설하는 일은 언론 개혁의 핵심이자 시작이 돼야 마땅하다.

“이용마 기자가 생전에 그토록 염원했던 MBC 지배구조 개선의 시간표는 2년 전 그날 이후 단 1초도 흐르지 못했다.”

얼마 전 8월 20일, 고 이용마 기자의 2주기가 있었다. ‘공정방송 사수’ 파업에 앞장서다 해고된 이용마 기자는 “공영방송의 주인은 시민”이라며 암 투병 중에도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하지만 ‘공영방송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그의 명제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신 있게 응답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공영방송을 정치권력으로 오염시킨 그 절대반지를,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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