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법무부가 가석방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하면서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80억원대 뇌물사범인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씨가 곧 풀려날 수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6월에는 4대 그룹 대표들이 청와대를 방문해 그의 사면을 건의하자, 대통령이 “고충을 이해한다.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고 했습니다. 곧이어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이 부회장 문제는) 꼭 사면으로 한정될 것이 아니고 가석방으로 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 흉흉한 소문에 점점 힘이 실렸지만, 그래도 저는 만만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정부에게도 적잖은 부담이 될테니까요. 무엇보다 이미 뇌물죄를 포함한 ‘5대 중대범죄’에 대해서는 사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정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면’이 아닌 ‘가석방’을 추진하는 거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런 꼼수로 국민을 기만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7월22일 청와대의 기막힌 입장 표명이 나왔습니다. “이재용 가석방은 법무부 소관”일 뿐이라고 말이죠. 그제서야 저는 이 정부가 재벌개혁에 무능할 뿐 아니라 비겁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고 그 덕에 이재용씨는 결국 풀려나겠구나 예상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이재용 가석방이 불법인 이유

그리고 지난 13일 이재용씨는 정말 풀려났습니다. 자신의 경영 승계를 위해 87억원의 회삿돈을 대통령 측근에게 바쳤고 그 과정에서 국민연금에까지 수천 억 원대 손실을 입힌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법원이 내린 ‘2년6개월’ 징역형조차 다 살지 않고 풀려난 것입니다.

단언컨대 그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풀려났습니다. 박 장관 스스로도 지난 4월 대정부 질의 때 그런 말을 했었죠. “(이재용 가석방은) 법무부 소관이지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가 있지 않은 한 검토할 수 없다”고. 당연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청와대가 ‘가석방은 법무부 소관’이라는 말로 면피하려는 것은 현 상황에서 청와대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대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재용씨의 뇌물범죄와 그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가 결국 박근혜 정부를 끌어내렸고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2016년 겨울부터 다음해 봄까지 이어졌던 촛불 시위에서 누적 인원 1000만을 훌쩍 넘긴 참가자들은 ‘박근혜 퇴진’과 함께 ‘이재용 구속’을 목놓아 외쳤습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에는 설명 의무가 있습니다. 죄질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형량조차 다 채우지 못한 그를 지금 풀어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법률이 정한 가석방 요건에 부합해야 합니다. 형법은 “개전의 정(뉘우치는 마음)이 현저한” 수형자를 가석방할 수 있다고 했고, 형집행법은 “재범의 위험성”을 고려해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이재용씨는 지금껏 자신의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정한 적 없고, 추가 기소된 관련 사건(삼성물산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 사건)에서도 여전히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직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그 지배권을 악용해 범죄를 저질렀으나 여전히 그 지배권을 조금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뉘우치는 마음이 느껴지고 재범 위험이 사라졌다 여겼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한 가석방이 적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범계 장관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 상황과 글로벌 경제 환경에 대한 고려 차원에서” 그를 풀어줬다고 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고만 했습니다. 이런 이유에 따른 ‘사면’이 적법할지는 몰라도(대통령의 사면권은 고도의 정치적 결단으로서 사법 심사 대상도 되지 않는 ‘통치행위’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 따른 ‘가석방’은 불법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재용 가석방은 불법입니다.

▲박범계 법무부장관이 9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서 이재용 가석방 결정 배경을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법무부 영상 갈무리
▲박범계 법무부장관이 9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서 이재용 가석방 결정 배경을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법무부 영상 갈무리

희망과 위로가 되지는 못할 망정

그리고 저는 그의 가석방이 ‘코로나19 경제위기’ 해법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경제가 기업 범죄자 한 명의 석방 여부에 좌우될 정도로 후진적일리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코로나19 사태에 기인한 경제적 위험 징후들이 그의 석방으로 해소될 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위험 징후 단면을 저는 얼마 전 한겨레에 실린 이성원 한상총련 사무총장 인터뷰 기사에서 봤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그는 “영업하고 싶어도 영업을 못하고, 폐업하고 싶어도 폐업을 못하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처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폐업을 한 자영업자 수가 코로나19 이전보다 오히려 적다고 합니다. 폐업에도 돈이 들기 때문에 대책없이 버티고만 있다는 것이죠. 그는 이러한 상황을 “무서운 징후”라고 표현했습니다.

그토록 위태로운 그들이 정부의 “자영업 사업장 규제 중심 방역”에 분노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지금의 전 사회적 경기 침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자신들만 평소처럼 영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정부가 자신들에게만 특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고통 분담과 정부의 자원 배분이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 기사를 보며 저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정부가 갖춰야 할 최고 가치는 ‘공정성’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단단한 ‘공정성’이 경제적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될 수 있겠구나. 반대로 정부가 가진 자를 더 보살피고 못 가진 자에게 더 가혹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래서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깨진다면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무너져 버리고 말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재용 가석방’ 사태가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금세 풀려나는 재벌 총수의 모습. 그렇게 ‘공정성’ 가치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한국 정치. 이미 경제적으로 위태로운 사람들에게 어떤 메세지가 됐겠습니까. 희망과 위로, 혹은 절망과 상처. 과연 어느 쪽이었겠습니까. 정부 주장과 반대로, 이재용 가석방 사태는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경제적 위험 징후들을 오히려 더 악화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번 이재용 가석방은 여러모로 ‘나쁜’ 정치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사면’도 아닌 ‘가석방’을 택하고 심지어 ‘가석방은 법무부 소관’이라는 주장까지 한 것은 나쁜데 비겁하기까지 한 최악의 정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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