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법무부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가석방 결정에 언론의 역할은 컸다. 

언론은 ‘이재용 부회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신호를 올해 상반기 내내 퍼트렸다. 여론조사 결과를 활용해 재벌의 사법 특혜를 ‘국민 동의를 받는 문제’로 치환했다. 이 부회장을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에 빗대는 등 미화·왜곡도 서슴없이 나왔다. 사법 정의와 평등의 문제는 이 같은 보도 홍수 속에서 ‘삼성 총수 구하기’로 축소됐다.

가석방 결정을 전한 10일 지면은 환영 어조가 지배적이다. 9개 전국단위 종합일간지 및 9개 경제지 중 사법 정의 가치를 우선한 매체는 2개에 불과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각각 사설로 “‘법 앞의 평등’ 원칙 뒤흔든 이재용 가석방”을 비판하고 “‘촛불’을 들었던 손이 부끄러워진다”고 밝혔다. 

▲10일 중앙일보 관련 보도.
▲10일 중앙일보 관련 보도.
▲10일 한국경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사설 갈무리.
▲10일 한국경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사설 갈무리.

그밖엔 “이재용 ‘반도체 코리아’ 위기 탈출에 전력 투구”(중앙일보), “이재용 가석방…초일류 경영으로 국민 기대에 답해야”(동아일보), “5년 공백 끝 복귀 李부회장, 경영 성과로 ‘억울함’ 입증하길”(조선일보), “가석방 결정된 이재용, 경제 활성화 기여해야”(한국일보) 등의 사설이 줄을 이었다. 한국경제는 아예 “풀려나는 이재용 부회장 ‘절반의 자유’”라고 보도하며 경영 활동에 제약이 없는 사면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보도는 지난 1월부터 계속됐다. 1월18일 이 부회장이 뇌물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2년 6월 형이 확정되며 재수감된 뒤다. 대부분 ‘재계발(發) 받아쓰기’ 보도였다. 언론은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 및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발언, 두 단체를 포함한 재계 5개 단체의 각종 탄원 및 고위 관료 면담 등에서 일일이 ‘기사 가치’를 찾았다. 

▲지난 4월 이재용 부회장 사면 필요성을 전한 보도 일부.
▲지난 4월 이재용 부회장 사면 필요성을 전한 보도 일부.

익명의 재계 관계자는 보도의 ‘마르지 않는’ 원동력이었다. 기사 대부분이 익명의 관계자를 통해 이 부회장의 사면 필요성을 전하면서 여론을 형성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세가 한창이던 지난 4월 “백신 확보에 역할을 할 수 있게 사면해야 한다”는 ‘백신 특사’ 보도는 대표적인 예다. 추상적 전언에도 진위를 파악하지 않은 인용 보도가 쏟아졌다.

가석방 심사를 하루 앞둔 지난 8일 머니투데이 기자는 가석방을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에 빗댄 칼럼을 썼다. “이순신에게 전장은 조선의 바다였고, 그의 무기는 병사들과 함께 이끈 거북선과 판옥선이었다”며 “이재용의 전장은 전 세계 경제 현장이고 그가 이끄는 배는 삼성이라는 거함이다. 명량해전보다 더 큰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자”는 것.  

▲8일 머니투데이 기사.
▲8일 머니투데이 기사.

청년 실업을 교묘히 이용한 기사도 있었다. 아시아투데이는 ‘삼성 이재용 역할론’ 기획 보도를 내고 “이 부회장의 경영 복귀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침체 된 고용시장에서도 꾸준히 나온다”며 “총수가 지휘하는 통 큰 투자가 대규모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신병과 신규 채용을 근거 없이 인과관계로 묶은 왜곡이다. 

여론조사는 프레임 전환의 수단이 됐다. 언론은 재력·경제적 지위에 따라 법을 달리 적용하는 법치주의 훼손 문제를 국민의 동의 여부 문제로 호도했다. 지난 4~7월 데일리안, 시사저널, YTN, 한국리서치 등이 여론조사를 의뢰한 결과 70% 안팎의 응답자가 이 부회장 사면이나 석방에 동의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를 기계적으로 전하고, 인용 보도한 매체들이 ‘국민 정서’를 강조하며 ‘국민도 이 부회장 사면을 바란다’는 보도가 되풀이됐다. 이중 한국리서치가 7월 실시한 여론조사는 편향된 질문으로 동의를 유도했다는 의혹을 샀다. 

▲한국리서치 등이 지난달 26~28일 실시한 NBS(전국지표조사) 여론조사 문항에 이재용 가석방 찬반을 묻고 있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한국리서치 등이 지난달 26~28일 실시한 NBS(전국지표조사) 여론조사 문항에 이재용 가석방 찬반을 묻고 있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김재하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가 9일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가석방 반대 기자회견 및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재하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가 9일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가석방 반대 기자회견 및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언론은 이런 방식으로 정치인과 관료들이 활용할 근거를 마련해줬다. 박범계 법무부장관은 지난 9일 가석방 결정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석방은 사회의 감정, 수형 생활 태도 등 다양한 요인들을 종합해 결정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 판사, 변호사, 교수 등 9명으로 이뤄진 가석방심사위원회도 세계 경제 및 코로나19에 따른 국내 상황 등을 비중있게 논의했다고 알려졌다. 상반기 내내 “세계 반도체 산업 경쟁에 신속 대응하고 투자하기 위해선 이 부회장이 경영을 진두해야 한다”고 보도한 언론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런 가운데 가석방을 비판하는 입장은 보도되지 않거나 축소 보도되고 있다. 경제민주주의21은 재벌개혁을 공약했던 현 정부의 이번 결정을 두고 “이 부회장 등이 사익을 위해 법치를 훼손하고 시장 질서를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을 이용해 손해를 입힌 것은 염두에도 없다”고 비판했다. 경실련은 “중대경제범죄자까지 풀어줌으로써 ‘공정경제’를 외쳤던 (정부의) 구호가 모두 거짓임이 이제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한성규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삼성재벌과 유착,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수구 보수언론, 정치권력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가스라이팅을 통해서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청와대와 정계, 언론이 합심해 재벌총수를 위한 찬가를 부른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잊혀지지 않을 부끄러운 사건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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