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영화 같은 이야기다. 

‘시’의 주연 윤정희 배우가 ‘알츠하이머로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간다’는 소식이 지난 2월 알려지면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시’도 함께 소환됐다. 윤 배우는 ‘시’에서 주인공 ‘양미자’를 연기했는데 영화에서 미자는 알츠하이머(치매) 진단을 받는다. 이창동 감독은 ‘이제와서 보니 윤정희 배우가 영화 촬영 당시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를 보였다’고 회상했다. 기막힌 비극이다. 

윤정희 배우는 진짜 미자를 연기한 걸까. 윤정희의 본명이 미자(손미자)다. 물론 이 감독은 윤 배우의 본명을 몰랐다. 그렇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 미자 역으로 윤 배우를 상정해놓고 썼다. 현실과 영화가 여러 우연으로 얽혀있다. ‘시’가 시에 대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사실 윤정희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영화 ‘시’는 문학적이다. 이 감독이 소설가 출신이 아니었다면 듣지 않았을 평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이 감독이 다작을 하는 부지런한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따라붙는 평이라는 생각도 든다. 문학적이라는 평은 긍정적 맥락에서 나오지 않아서다. 

이 감독은 노무현 정부의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덕분에(?) ‘좌파’ 딱지도 붙었다. 영화 ‘시’는 그가 몸담았던 정권이 교체된 이후인 2010년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에서 탈락하면서 화제가 됐다. 한 심사위원이 그의 ‘시’ 각본이 ‘각본 형식이 아니라 소설같은 형식’이라며 0점을 줬다. 그렇게 억울한 점수를 받은 ‘시’는 같은해 무려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역설적으로 ‘시’의 각본은 문학적이었기 때문에 각본상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 시/ 이창동 각본집/ 아를 펴냄
▲ 시/ 이창동 각본집/ 아를 펴냄

 

‘시’의 각본집이 올해 출판됐다. 영화 개봉 11년만이다. 각본집에는 박준 시인의 추천사와 이창동 작가의 글, 작가노트와 현장스틸,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이창동 인터뷰,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에세이, 시인 클로드 무샤르의 이창동 인터뷰 등 다양한 읽을거리가 ‘시’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함께 실렸다. 잘 짜여진 소설 한편과 관련 평론을 연이어 읽는 기분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성범죄 가해 공범 중 하나가 자신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미자가 시창작 수업을 듣는 이야기다. 

‘시’는 이창동의 시론이기도 하다. 손자 문제를 처리(?)하는 동시에 쓰여지지 않는 시를 쓰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미자는 문학이 왜 필요한지, 시란 무엇인지, 시는 어떻게 써야하는지 등을 보여주는 동시에 삶에 대해 말한다. 삶과 유리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폭력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사를 직면하면서 미자가 시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시’는 앞서 2007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2탄의 성격도 있다. ‘밀양’에선 범죄자가 종교라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죄를 회피하는 과정과 그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을 그렸다면 ‘시’는 가해와 피해의 역학관계를 피해가지 않는다. 김수영의 시론을 빌어오면 미자는 풍경의 아름다움 정도를 몇몇 언어로 조탁하는 과정을 넘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태도로 가해를 속죄하고 피해를 공감한다. 

밀양이 반면교사라면 시는 교과서다. 밀양에서 피해자 전도연이 더할 나위 없이 서럽게 오열해서 슬프지만 시에서 윤정희는 울음소리조차 샤워 물소리에 숨겨서 서럽다. 

두 작품의 공통점도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에서 “제도로서의 종교와 예술로부터 ‘종교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그 자체를 구원”해낸다고 했다. 가해의 합리화(나는 피해자가 아닌 신에게 용서받았다)를 종교로 위장한 ‘종교적인 것’과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예술적인 것(예술은 이상적이고 고상한 것이라는 편견)’에 대한 지적이다. 

▲ 영화 '시'의 한장면. 미자(윤정희)는 노인 간병하는 일을 하는 인물로 나온다
▲ 영화 '시'의 한장면. 미자(윤정희)는 노인 간병하는 일을 하는 인물로 나온다

 

미자는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멋쟁이처럼 보이지만 힘들게 노인을 간병하며 딸을 대신해 손자를 키우고 있다. 느닷없이 시를 배우러 다니지만 딱히 언어사용에 탁월한 수강생도 아니다. 미자는 자신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이다. 어깨가 아픈 줄 알고 병원에 갔지만 병원에선 치매 진단을 내린다. 자신의 고통조차 잘 모르는 사람,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필부필부다.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계속 위를 본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무를 올려다본다. 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이고, 그 아름다움은 이상이며 이상적인 것은 하늘에 있을 것이란 고정관념을 잘 드러낸다. 미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 ‘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계속 헤맨다. 그러다 손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같은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충격에 빠진다. 이제 미자 삶에 이상적인 것은 없다. 삶의 단 한가지 문제만이 남았다. 

아도르노의 언설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건 야만이다”란 문장이 연상된다. 손자가 성폭행범이 됐는데 어찌 한가하게 시나 쓰고 있겠는가. 가해자들의 아버지(어머니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범죄를 은폐하는 모습을 젠더화한 것으로 보인다)들은 학교 측(교감선생님으로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나오는 것도 소소한 볼거리)과 함께 언론보도를 막고 피해사망자 유족에게 3000만원으로 합의를 본다. 이 과정에서 괴로워하는 건 미자뿐이다. 

▲ 영화 '시'의 한장면. 성범죄 가해자들의 아버지들과 해당 학교 교감선생님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
▲ 영화 '시'의 한장면. 성범죄 가해자들의 아버지들과 해당 학교 교감선생님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

 

최명란의 ‘아우슈비스 이후’라는 시가 함께 떠오른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중략)/ 이 지상엔 사람이 없다/ 하늘엔 해도 없다 달도 없다/ 모든 신앙도 장난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남은 자들의 삶은 이어진다. 산자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한다. 중요한 건 아우슈비츠에도 폭력은 반복되고 그 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창작 교실에서 여러 사람이 다양한 삶의 경험을 말했지만 시를 완성한 건 미자뿐이었다. ‘시’는 시를 완성한 미자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가해자가 된 손자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원치 않게 몸을 허락하기도 하고, 손자를 붙잡고 울부짖으며 질책했지만 피자를 사먹이고 손발톱을 깎인 뒤 가슴 아픈 속죄의 길로 보냈다. 피해자 추모미사에 참석하거나 그가 뛰어내린 다리에 가보기도 했다. 
 
‘시’는 미자가 완성한 시를 읊으며 끝난다. 시 전반부는 미자의 목소리로, 후반부는 피해자의 목소리로 읽는다. 그렇게 가해자 측이 피해자 측에 서보고, 삶과 예술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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