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권 임기 말 3년 임기의 양대 공영방송 이사직 공모가 한창이다. 지난 7일부터 2주간 방송통신위원회에 77명이 지원서를 접수했다. KBS 이사에 55명(이후 2명 자진철회),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방문진) 이사에 22명이 지원했다. 

방통위는 면접심사를 통해 국민을 대신해 질의하는 등 검증을 거치겠다는 입장이지만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관행대로 여·야가 낙점한 인사들이 추천·임명될 공산이 크다. 전국언론노조 등이 시민 참여를 보장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 통과를 촉구하는 이유다. KBS 이사회와 방문진은 KBS 사장과 MBC 사장 임명 추천·제청권이 있다. 오는 8월 말이면 양대 공영방송 이사회 인선은 마무리될 전망이다.

이사직 지원 인사들 면면을 보면 실망스럽다. 극단적 우파 성향의 차기환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번에 방문진 이사에 지원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세월호, 5·18단체들이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폄하와 비하에 거칠것 없던 과거 극단적 발언과 행보에 대한 반발이었다.

차 변호사는 2009년 방문진 이사에 임명돼 6년 동안 8·9기 이사로 활동했다. 방문진 임기를 마치고는 바로 KBS 이사에 임명됐다. 직업이 공영방송 이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아스팔트 우파가 공영방송을 장악한 암흑기였다.

▲ 왼쪽부터 KBS, MBC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 왼쪽부터 KBS, MBC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공영방송 이사회를 다시 이념 전쟁의 장으로 만들 것인가. 야권이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고개를 돌려 여권 쪽을 봐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 KBS 이사에 지원한 민병욱 전 언론진흥재단 이사장은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미디어특보단장을 지낸 인사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최근 선거에서 집권 여당 인사의 당선을 위해 뛰었던 인물이 차기 사장 선임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사실 자체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선거 보도 신뢰도를 훼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특보를 지냈던 김인규 전 사장 당시 KBS 안팎 갈등에 비춰보면, ‘캠프 출신’에 대한 내부의 우려는 당연지사다. 하물며 2022년은 대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해다.

방문진 이사에 지원한 권태선 전 KBS 이사 행보도 구설에 올랐다. 지난해 9월 KBS 시청자위원장을 맡았던 그의 임기는 내년 8월까지였으나 방문진 이사 지원을 위해 시청자위원장을 사퇴했다. 권 전 이사는 2015년부터 3년 동안 KBS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대표적 진보 언론인이다. 195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코리아타임스와 한겨레 기자를 거쳐 한겨레 편집국장과 편집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대표, KBS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리영희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다.

권 전 이사가 방문진 이사에 임명되면 ‘KBS이사→KBS 시청자위원장→방문진 이사’라는 유일무이한 경력을 갖게 된다. 

이에 언론개혁시민연대(언론연대)는 지난 22일 “KBS시청자위원장의 연이은 중도사퇴는 공영방송 시청자대표기구 위상을 흔드는 엄중한 일”이라며 “KBS시청자위원회 수장이 도중 사퇴 의사를 밝히고, 그 이유가 타 방송사 이사직에 공모하기 위함이라는 점에 우려가 크다”고 비판했다.

KBS 시청자위원회는 시청자 대의기구로서 집행기관(KBS 사장 등 경영진) 및 KBS 이사회와 상호 협력·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라는 점에서 KBS 시청자위원장이 갖는 무게감은 타 방송사와 같지 않다. 지난해 총선에서도 언론학자인 당시 이창현 KBS 시청자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 오르면서 자진 사퇴한 적 있다. 언론학자와 원로 언론인의 책임감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권 전 이사 입장도 들었다. 그는 30일 통화에서 “KBS 시청자위원장은 굉장히 소중한 자리이지만 일에는 경중이 있다”며 “나를 제외한 14명의 KBS 시청자위원 한 분 한 분이 굉장히 훌륭하다. 15분의 1인 내가 빠진다고 해서 KBS 시청자위원회가 흔들리거나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권 전 이사는 “방문진 이사가 갖고 있는 의미는 좀 다르다”며 “신뢰의 거점으로서 MBC가 제 역할을 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언론이 제자리 찾는 일을 같이 한번 해보자고 호소 드리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공영방송 이사직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권 전 이사는 ‘양지만 찾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KBS 이사나 방문진 이사가 양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갈등이 심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어 “(2015년~2018년) KBS 이사를 하면서 하루하루가 힘들었다”며 “그럼에도 임기 말 KBS 사장 선임 방식을 바꿔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충분히 협의해 새 제도를 만든 것이다. 그런 경험이 MBC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방문진 이사 지원은 “언론을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책임감의 발로”라는 것이다. 결코 자리 나눠먹기가 아니라는 것.

▲ 권태선 전 KBS 이사.
▲ 권태선 전 KBS 이사.

반면, 김동찬 언론연대 정책위원장은 “시민 대표성을 확대할 수 있도록 공영방송 거버넌스를 개편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KBS 시청자위원장 위상과 역할 제고는 매우 중요하다”며 “자리가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KBS 시청자위원장들이 임기를 마치지 않고 중도 사퇴하는 게 바람직한지 묻고 싶다”고 꼬집었다.

김 위원장은 “특정 인사들이 공영방송 이사를 연임해야 할 만큼 인재풀이 없는 것인지, 제대로 된 직무 평가 후 (공영방송 이사직 등의) 선임이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밝혔다.

광고 파이가 한정된 방송시장에선 KBS와 MBC가 경쟁사라는 점에 우려도 있다. 한 관계자는 “KBS 이사회는 최고의사결정 기구로서 주요 경영 전략과 정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리”라며 “반면 방문진은 ‘의사결정’보다 ‘관리감독’에 방점이 찍혀 있다. KBS 경영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위치에 있던 분이 방문진 이사가 된다면 MBC로서는 나쁠 게 없는 선택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KBS에서 우려할 일”이라는 것이다. 

권 전 이사는 “KBS와 MBC는 경쟁사라기보다 역할을 분담하는 공영방송이라고 생각한다”며 “KBS도 해외 유수의 언론에 비하면 기자 수가 적다. MBC 특파원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만큼 취재력이 약화돼 있는데, 언론사끼리의 경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30년 동안 기자를 해온 입장에서 한국 언론이 지닌 한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며 “방문진 이사로서 의미 있는 역할에 매진하는 것으로 (KBS 시청자위원장 중도 사퇴에 대한) 비판에 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문재인 정권 말 방송 유관기관 주요 자리에 ‘회전문 인사’, ‘돌려막기 인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3일 여당 몫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윤성옥 현 코바코 비상임이사(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등을 위촉했다. 직전까지 코바코 비상임이사였던 김유진 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도 청와대 몫으로 방통심의위원에 위촉됐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지난 3월 신임 코바코 비상임이사로 신미희 민언련 사무처장과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임명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