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노동자들의 투쟁은 주로 ‘권리’ 투쟁이었습니다.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 정당한 임금 받을 권리, 안전하게 일할 권리 등을 인정받기 위해 싸웠죠. 오랜 싸움이 고통스럽게 이어진 후에야 그 권리들은 비로소 글로 새겨졌고, 한국의 노동법도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존재’ 투쟁을 벌입니다. 성문화된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기 어려워진 ‘사장님’들이 전략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자기 회사에서 똑같이 일하던 노동자들의 계약관계를 뒤틀어 ‘다른 회사 노동자’(파견직, 하청업체) 심지어 ‘사장’(프리랜서)으로 만들었죠. 그래서 ‘권리’ 주장에 앞서 ‘존재’(노동자성)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불리는 방송사에 그런 노동자들이 특히 많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존재’ 투쟁은 ‘권리’ 투쟁보다 더 가혹합니다. 노동자냐/아니냐는 주로 그들의 업무 내용과 방식에 따라 좌우되는데, 그 내용과 방식을 주로 ‘사장님’들이 만드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존재’ 투쟁이 더 어려운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연대’가 어렵기 때문이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정규직, 협력업체 소속, 프리랜서 등으로 나누어져 뭉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정규직 노동자들이 협력업체 노동자나 프리랜서들의 권리 주장을 막아서는 일도 벌어집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장님’들의 가장 큰 노림수였을지 모릅니다. 분열된 노동자들은 착취하기 쉬우니까요.

그래서 저는 MB정부 시절에 있었던 MBC 작가들의 파업 연대를 특별한 사례로 기억합니다. 2008년 12월 언론노조가 MB정부의 언론 장악 시도에 맞서 총파업에 나섰을 때, 50여명의 MBC 작가들이 지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2012년 4월 MBC 파업 때도 작가협회의 지지 성명이 있었죠. 2017년 9월 MBC 파업 때도 70여명의 라디오 작가들이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당시 발표된 성명서들에는 모두 작가들의 ‘프리랜서’ 신분이 드러나 있습니다. 파업에 연대했을 때 가장 먼저 잘려나갈 수 있는 처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그들은 연대했고, 그 연대가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정규직 백화점’ 사장의 노림수를 통쾌하게 무너뜨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연대였던 셈이죠.

작가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2012년 7월, MBC는 ‘피디수첩’ 작가들을 전원 해고하며 그 이유로 “노조 파업을 옹호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죠. “작가는 프리랜서이므로 ‘해고’가 아니라 ‘교체’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법적으로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해고할 수 있는 정규직들의 투쟁에 그런 이유 따위 필요 없는 비정규직들이 함께 했으니, 가장 먼저 내쫓겼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지금,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들 합니다. 전 MBC 사장 김재철 씨의 노조 탄압 범죄는 유죄로 확정되었고, 그 탄압에 맞서다 해고된 MBC 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무효 판결을 받아낸 뒤 복직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MBC 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송사 비정규직의 ‘존재’ 인정 투쟁에도 성과가 있었습니다. 법원은 2011년 KBS에서 5년간 일한 영상취재요원(VJ)의 노동자성을 인정했고, 2014년과 2017년에는 MBC와 교통방송에서 일한 프리랜서 PD들의 노동자성을 각각 인정했습니다. 2019년과 2020년에는 MBC와 TJB대전방송의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CJB 청주방송에서 14년간 프리랜서로 일했던 고 이재학 PD와 같은 방송국의 ‘프리랜서’ 혹은 ‘파견직’ 작가, PD, MD 12명이 법원과 고용노동부에 의해 노동자성을 인정받았습니다.

▲2020년 4월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의 모습. 사진=미디어오늘.
▲지난 4월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의 모습. 사진=미디어오늘.

그리고 올해 3월, MBC 방송 작가들도 마침내 노동자성을 인정받았습니다. 10년 가까이 MBC ‘뉴스튜데이’에서 회사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으며 특정 코너를 담당해왔던 작가들이 프로그램 개편을 이유로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고용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가 그들의 ‘노동자성’과 ‘부당해고’를 인정한 마땅한 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MBC는 끝내 이 작가들을 법정에까지 세우려나 봅니다. 중노위 판정에 불복하며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지금의 MBC 사장인 박성제 전 기자님. 파업 주도를 이유로 해고당할 때 인사위에 나가 “직장인에게 해고는 사형선고 아닙니까?” 외치셨었죠. 당시 인사위원이던 권재홍, 이진숙 본부장을 한때 존경하고 좋아했었다고요(박성제 저서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지금 기약없는 소송에까지 내몰린 작가들에게는 박성제 대표가 한때 그런 인물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작가들에게 파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쫓아내며 “해고가 아니라 교체”라 했던 과거의 MBC와 프로그램 개편을 이유로 쫓아내며 “근로자가 아니므로 해고가 아니”라는 지금의 MBC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 MBC 작가들의 파업 연대가 참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방송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방송 산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비정규직을 많이 써서 필요에 따라 사람을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구조는 비단 방송사 사장님들만 원할까요? 다른 산업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왜 유독 방송사만 ‘비정규직 백화점’ 소리를 들을까요? 방송 산업 자체가 특수한 게 아니라 그 산업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고약한 겁니다. 그리고 그 특수성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왜 기자, PD 등은 정규직이어야 할까요. 그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고용을 누려야 하는 사람들과 그 특수성에 계속 희생되어야 하는 사람들을 ‘선긋기’했기 때문이지요. 그 ‘선긋기’가 지금은 부당하게 해고되면 ‘해고 사유의 정당성’만 다투면 되는 노동자(박성제 대표를 포함한 MBC 해직 기자들)와 자신의 ‘노동자성’부터 입증해야 하는 노동자(‘뉴스투데이’ 작가들)를 가르고 있고요.

그리고 지금의 방송사 정규직 노조들. 한때 언론 민주화를 위해 가열차게 투쟁했고 지금은 각 방송사 임원직을 차지하고 있는 당신들. 과거 자신들의 투쟁에 뜨겁게 연대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지금 투쟁에 어떻게 화답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송사가 ‘비정규직 백화점’이라는 조롱을 받고 그 비정규직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가 계속 논란이 되는 지금, 왜 각 언론사 정규직 노조들은 그 문제에 대해 한마디 입장표명 조차 없는지, 앞으로 또 어떤 정권이 방송사를 장악하려 들고 그 정권에 부역하는 경영진이 노조를 탄압할 때, 그때는 무슨 염치로 연대를 호소하려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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