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상자로 인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업이 사과 상자에 돈을 두둑이 넣어두고 핵심 권력층을 찾아가면, 이는 단연 최고로 정중한 인사였다. 압권은 1991년 이용식 세계일보 기자의 특종으로 알려진 수서 비리다. 수서지구는 무주택 서민에게 분양될 땅이었지만,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로비로 정 회장과 결탁한 택지조합에 ‘특혜분양’으로 넘어갔다. 당시 정 회장은 이 특혜분양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백억이 넘는 돈을 사과 상자에 나눠 남아 정·관계 실세에게 뿌렸다. “아주 특별한 사과니까 잘 드십시오”라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였다.

이 과정엔 여러 언론인도 연루돼 있었다. 언론을 장악하고자 한 장태수 회장이 서울시청 기자들을 상대로 수백, 수천만원씩 촌지를 돌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1997년 동아일보는 중견 언론인 40명이 포함된 한보 리스트를 보도했지만, 검찰은 이 사건을 조용히 덮었다. 언론계의 자정 노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한보의 계속된 극진한 대접에 언론은 1996년 한보건설 현장에서 일어났던 사고도 외면하며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인이 나서서 돈을 거뒀던 사례도 있다. 1991년 보사부(보건사회부, 현 보건복지부)에 출입했던 기자들이 추석 떡값과 해외여행을 명목으로 제약·제과·화장품 업계와 대우재단, 아산재단, 약사회 등에 8850만원을 받았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두 명의 기자가 파면됐고, 언론사들은 1면에 사과와 반성의 글을 실었다. 이후 기자윤리강령이 제정됐지만, 한번 뿌리박힌 촌지 관행은 사라지는 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거슬러 올라가 2019년, ‘박수환 문자 사건’이 터졌다. 청탁금지법이 제정된 지 약 4년이 흐른 뒤였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박수환 문자 내역에서, 여러 언론인과 박수환 뉴스컴 대표 사이에서 기사 거래 흔적이 발견됐다. 언론사 전·현직 간부가 접대골프, 초호화 해외여행, 자녀 채용 특혜 등을 받고 기업에 협찬 기사를 써주거나 불리한 기사를 빼줬다. 박수환 씨는 기업과 언론을 잇는 로비스트였다. 연차가 낮은 기자들에게도 아주 깍듯하고 공손한 말투를 썼고, 고급식당에서 식사와 선물을 대접했다. 그러니 기자들은 그가 전달하는 기업의 청탁을 쉬이 거절하지 못했을 테다.

이런 대형 비리에도 언론은 둔감했다. 언론과 기업의 부적절한 관계는 일상화한 ‘관행’이란 인식이 강했다. 뉴스타파 보도에도 언론은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고, 이에 민주언론시민연합이 31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보도본부장에게 무보도 이유를 묻는 질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언론이 아닌 사법부, 국회, 청와대 등에서 일어난 것이었어도 보도하지 않았겠냐”라는 질문과 함께였다.

반성이 없었기에 비리는 또 반복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변인을 맡았던 이동훈 조선일보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엄성섭 전 TV조선 앵커가 수산업자에게 금품을 받은 혐의로 지난달 입건됐다. 이동훈 전 논설위원은 수백만원 상당의 골프채를, 엄성섭 전 앵커는 아우디, K7 등 차량과 접대를 받은 혐의다. 이번에도 역시 반성은 없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 따르면 조선일보, TV조선, 한국경제는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일보와 TV조선은 자사 언론인이 연루된 일임에도 사과 한 줄 없었다.

▲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왼쪽)와 엄성섭 TV조선 앵커(오른쪽)
▲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왼쪽)와 엄성섭 TV조선 앵커(오른쪽)

권력 주변엔 늘 아부와 접대가 따라붙는다. 펜의 권력을 쥐는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촌지로 오가던 노골적인 아부는 부동산 정보, 주식 로비, 호화 외유와 골프 접대 등으로 점점 발전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문제는 지금의 언론 환경이 과거보다 비리가 이뤄지기 더 쉽다는 데 있다. 언론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회사가 나서서 협찬·광고성 기사를 장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문화가 일상화하면 뒷돈을 내 지갑에 받아 챙기는 개인적 일탈도 더 쉽다. ‘경언유착이 뭐가 문제냐’란 안이한 인식이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

빌 코바치·톰 로젠스틸의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서 나오는 열 번째 원칙은 “편집국 기자에서부터 이사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자들은 반드시 개인적인 윤리 의식과 책임감, 즉 ‘도덕적 나침반’을 지녀야 한다”다. 언론인의 정체성을 이룰 만큼 윤리와 도덕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권력을 감시하고 부정부패를 고발할 정당성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언론은 철저하게 자정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수서 비리 때 기자들이 들었던 “언론이 비판할 자격이 되느냐”란 질타를 다시 듣지 않도록 말이다. 단순히 윤리강령과 규범을 제정하는 거로는 부족하다. 언론이 나서서 언론인 비리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동업자 봐주기’ 식으로 언론인 비리를 더는 눈감아줘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지난한 ‘언론 비리의 역사’는 또 반복될 것이다. 권력을 감시하라며 시민이 넘겨준 이 권력은, 언제 다시 거둬질지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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