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이하 HRW)’가 국제기구로선 처음으로 피해자 및 정부 당국·연구기관 등을 심층 조사한 ‘한국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를 펴냈다. 한국 실태의 심각성을 경고한 HRW는 근본적으로 정부가 한국의 성 불평등 격차를 없애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HRW는 16일 오전 10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라는 이름의 보고서 발간 기자회견을 온라인으로 열었다. 권주희 HRW 서울 디렉터의 사회로, 보고서 책임연구원 헤더 바(Heather Barr) HRW 여성권리국 공동 디렉터와 윤리나 아시아 지역 선임연구원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보고서는 국제기구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를 심층 조사해 정부에 권고안을 낸 첫 번째 사례다. HRW 연구팀은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피해자) 12명과 범죄 피해 후 자살한 여성의 유족을 직접 인터뷰했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 디지털 성범죄 관련 정부 정책에 관여한 전직 관료, 경찰 수사관, 정부기관 전문가, 민간 단체 등과도 20여차례 인터뷰를 실시했다. 보고서는 2019년 11월부터 2020년까지 온라인으로 진행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 경험 설문조사도 진행해 분석 자료로 썼다.

▲16일 기자회견에서 상영된 자료 영상 중 일부. 사진=HRW 홈페이지 갈무리.
▲16일 기자회견에서 상영된 자료 영상 중 일부. 사진=HRW 홈페이지 갈무리.

 

피해자 13명의 목소리, 목숨 끊은 피해자도

HRW는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한국 디지털 성범죄 대응의 미비점을 찾아냈다. 피해자 대부분이 수사기관의 소극적 수사 관행부터 성범죄 특수성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수사관들의 2차 가해 행태를 지적했다. 법원은 범죄자들에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주로 선고하면서 성 범죄를 사소한 사건으로 간주한다는 비판도 높았다.

2018년 최지은씨가 불법 촬영을 당했을 때, 피해 여성은 7명이 더 있었다. 가해 남성은 최씨 집 인근의 건물 지붕에서 2주 가량 그의 방 창문을 불법 촬영했다. 경찰은 ‘최씨 경우 나체가 찍혔기에 기소될 수 있지만 다른 여성들은 옷을 입고 있어 기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법은 아직도 촬영물이 자극적·모욕적이어야 한다는데, 그냥 ‘동의없이’라고 법에 기재돼야 한다”며 “신체 접촉이 없다는 이유로 카메라를 이용한 범죄를 가볍게 생각한다. 피해자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고서 내용 재구성)

박지영씨는 남자친구로부터 불법촬영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는 휴대폰에 여성들의 치마 속과 엉덩이를 찍은 사진을 갖고 있었고, 클라우드 저장소에서 잠자는 여성의 나체와 속옷 차림 사진 수십 장이 발견됐다. 사진 속 여성들을 수소문하던 박씨에게 가해자는 ‘관련 게시물을 삭제하지 않으면 네 사진을 유포한다’고 협박했다. 가해자 가족도 연락을 해왔다. 수사관도 ‘가해자와 합의하지 않으면 가해자의 변호사가 명예훼손과 가해자 파일을 무단으로 뒤진 혐의로 고소한다’며 고소 취하를 종용했다. 가해자의 선고 형량은 벌금 300만원. 박씨는 “그는 학교 생활에서 별 다른 지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가해자와 지인들 몇몇은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강유진씨는 헤어진 남자친구로부터 합성 사진 피해를 입었다. ‘딥페이크 포르노’라 불리는 신종 디지털 성범죄다. 피해자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해 각종 SNS, 포르노 사이트 등에 무단 배포한다. 가해자는 강씨 연락처와 직장, 부모님 정보도 해시태그로 붙였고 ‘섹스 파트너를 구한다’는 문구까지 함께 올렸다. “그녀가 다른 남자 만나는 걸 어렵게 하고 싶었다”는 게 범행 이유다. 가해자가 올린 수백 개의 사진은 이미 광범위하게 유포된 상황. 강씨는 게시물을 일일이 갈무리해 게시물마다 삭제 요청을 하면서 조작 사진을 지워나갔지만 얼마 지나면 게시물은 또 올라왔다. 가해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강씨는 “이 범죄는 한 사람을 사회적·정신적으로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력히 처벌돼야 한다”고 밝혔다.

HRW는 피해자들이 자살 충동을 일상으로 느낄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실제 자살한 피해자 사례도 직접 조사했다. 2019년 9월 불법촬영 피해 사실이 확인된 후 목숨을 끊은 한 임상병리사였다. 동료 남성 임상병리사가 병원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가해자는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HRW을 만난 사망자의 부친은 “10개월은 고사하고 2년(검찰 구형량)도 너무 짧다”며 “법이 더 강력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밤마다 울었다. 잠도 못자고 진정제를 먹어야 했다. 그 일이 내 방에서 일어났으니, 때론 아무 일 없는 데도 이유없이 너무 무서울 때가 있다.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우울증과 불안증 약을 먹고 있다.” 생존자 이예린씨의 직장 상사는 그에게 초소형 카메라가 달린 시계를 선물준 뒤 이씨를 훔쳐 봤다. 이씨는 시계를 침실에 뒀다. 사실을 알게 된 후 항의하던 이씨에게 가해자는 ‘그거 알아보느라 밤에 잠 안자고 있었던 거냐’고 말하기도 했다.

HRW은 사건 이후 정신적 트라우마를 비롯해 △사회적 낙인과 명예훼손 △고용상의 피해 △이주 △삶의 방향 변화 등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이주를 결심한 21세 생존자는 HRW에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사는 건 내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밝혔다. 익명의 경찰 수사관은 “성관계 불법 촬영을 당한 한 피해자는 사건 후 대학을 자퇴하고 미국 유학을 갔다. 이후 다시 돌아왔으나 사람들이 알아봐 성형수술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밖을 전혀 못 나갔다”고 전했다.

▲이번 조사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집필한 헤더 바(Heather Barr) HRW 여성권리국 공동 디렉터와 윤리나 아시아 지역 선임연구원(아래). 사진=온라인 기자회견 갈무리.
▲이번 조사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집필한 헤더 바(Heather Barr) HRW 여성권리국 공동 디렉터와 윤리나 아시아 지역 선임연구원(아래). 사진=온라인 기자회견 갈무리.

 

혜화역 시위 조명 "시스템적 이중잣대 불만 폭발"

HRW은 디지털 성범죄를 놀이나 사소한 사건으로 치부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도 짚었다. 보고서는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일부 남성들이 촬영물 속 당사자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개의치 않고 불법 촬영물 유포·소비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으로 간주한다는 말을 인터뷰이들에게 들은 점”이라고 밝혔다. 한 경찰 수사관은 HRW에 “한 가해자는 ‘진짜 남자로 인정받은 것 같았다’는 말을 했다”거나 “경찰관들도 서로 불법 촬영물을 돌려보고 비웃는 경우가 흔하다”고 전했다.

가해자들에게 디지털 성범죄는 돈벌이다. 불법카메라를 탐지하는 회사 2곳의 대표들은 HRW에 “1기가 바이트나 1시간 30분 영상 분량의 시장가는 500만원”이라거나 “동영상 1시간 분량은 200~300만원에 거래될 수 있고, 어떤 플랫폼에선 동영상에 대해 먼저 돈을 지불하고 광고나 이 영상을 링크한 웹사이트들이 낸 수수료와 회비를 받아 투자금을 회수한다”고 설명했다. HRW 설문조사에선 ‘신형 아이폰’을 사기 위해 한 스터디 카페 화장실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했던 중학생의 사례가 확인됐다.

HRW는 형사사법 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HRW는 “경찰은 신고 접수를 거부하고, 피해를 가볍게 여기고, 피해자를 비난하고, 촬영물을 신중하게 다루지 않고, 부적절하게 심문하는 경우가 많다”며 “검찰의 성범죄 사건 불기소 비율은 높은 편이고 판사들도 낮은 형량을 선고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HRW는 2019년 검찰이 성범죄 사건의 46.8%에 불기소 처분을 내렸으나 이는 살인사건의 27.7%와 강도 사건의 19%와 비교되는 수치라고 강조했다. 선고를 보면 2017년 체포된 가해자 5437명 중 단 2%(119명)만 징역형을 받았다. 경찰 수사관은 “가해자를 신고해도 처벌받을 가능성은 10%도 안된다. 신고하면 경찰로부터 또 다른 인권침해를 받을 걸 아니 신고율이 아주 낮다”고 밝혔다.

▲2018년 ‘제3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7일 낮 3시께 서울 혜화역 인근에서 열렸다. 사진=김예리 기자
▲2018년 ‘제3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7일 낮 3시께 서울 혜화역 인근에서 열렸다. 사진=김예리 기자

 

HRW는 이 배경으로 젠더 폭력을 엄밀하게 보지 않는 법 체계를 들었다. 젠더 폭력에 관대한 한국 사법 체계와 관습은 꾸준히 국제기구의 질타를 받아왔다. 2018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5년 보호 명령이 포함된 사건의 약 43%가 형사 처벌로 이어지지 않고, 명령을 위반해도 벌금형에 그쳤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 위원회는 한국의 강간 관련 법률이 동의 여부가 아니라 ‘폭력이나 위협’의 증거를 요구하고, 부부 사이 강간이 법률에 범죄로 규정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HRW는 이와 관련 2018년 한국의 혜화역 시위를 조명했다. HRW는 성범죄 가해자 성별에 따른 정부·사회의 비대칭적 대응을 시위 촉발 이유로 지목했다. 디지털 성범죄의 상징과 같았던 ‘소라넷’은 1999년에 설립돼 2016년 강제폐쇄됐다. 피해자, 여성운동 단체 등은 1990년대부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수사기관의 대응을 주장했다. HRW는 “한 여성이 비밀리에 남성 누드 모델을 촬영해 온라인에 올린 사건이 있었는데, 경찰을 며칠 만에 그 여성을 체포했고 3달 만에 형사처벌을 받았다”며 “신속 대응과 엄한 처벌은 여성을 상대로 한 디지털 성범죄에서 경찰·법원이 보여준 안일한 대응과 크게 대조됐고 두 기관의 이중 잣대를 여실히 보여줬다”고 밝혔다.

▲16일 기자회견에서 상영된 자료 영상 갈무리. 직장 상사로부터 불법촬영 피해를 입은 생존자의 이야기가 사례로 쓰였다.
▲16일 기자회견에서 상영된 자료 영상 갈무리. 직장 상사로부터 불법촬영 피해를 입은 생존자의 이야기가 사례로 쓰였다.

 

피해 구제책 강화에 '성별 평등' 근본적 접근 강조

HRW는 민사상 구제책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은 실직, 이사, 촬영물 삭제 등의 이유로 경제적 비용을 떠안는 반면 가해자에게 관련 책임을 물을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다. HRW는 “생존자가 가해자와 불법촬영물 소지자에게 촬영물 유포를 중단하고 삭제토록 하는 법정 명령을 요청할 수 있고, 가해자가 책임지고 촬영물을 삭제하도록 재판부에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며 “범죄로 인한 정신적·경제적 피해와 비용에 대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불법촬영물 삭제를 거부한 플랫폼에게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경찰·검찰·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강화도 시급한 과제로 지목됐다. HRW는 경찰·검찰에 “모든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수사하고 기소해야 한다”거나 “범죄 피해자들과 정기적으로 연락해 향후 재판 일정 등 사건 진행상황과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절차상 옵션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권고했다. 여성 경찰·검사·판사 임용 비율을 늘려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정부엔 포괄적인 성교육과 디지털 시민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HRW는 언론 보도나 논문, UN아동권리위원회같은 기구의 논평을 종합해 한국의 성교육이 금욕을 강조하는데 치중돼 연령에 맞는 성교육을 제공하고 있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 성소수자 내용을 삭제하거나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교육이 이뤄진다고도 비판했다.

HRW는 정부에 “경찰, 법조계, 정치적 대표성, 공적생활 등에서 여성의 참여를 높이고, 성별 임금격차를 철폐하고, 돌봄 노동에서 평등한 참여를 증진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을 최소화하는 등 성차별적 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해 한국 사회 성불평등 수준을 낮춰야 한다”며 “디지털 성범죄 관한 양형과 구제의 적절성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립하고,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상세 통계자료를 일반에 공개한다”는 등의 안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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