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문화예술노동연대는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2021년 문화예술노동자 요구안 발표’를 통해 문화예술노동자 전체 요구 및 각 문화예술 현장의 요구를 드러냈습니다. 그 중 영화, 음악, 방송작가, 게임, 웹툰, 공연, 예술강사 들의 노동 현실과 구체적 요구를 연속기고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편집자 주

방송작가들은 제작 현장에서 각종 부당한 일들을 공기처럼 마주한다. 프로그램 개편이나 PD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등의 해괴한 이유로 해고당하고, 임금을 상품권으로 지급받거나, 밤낮 일을 해도 방송이 송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다. 방송 기획부터 제작 마무리까지 프로그램을 위한 온갖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으면서도 ‘작가’라는 타이틀, ‘프리랜서’라는 허울을 이유로 정해진 원고료 외에 아무런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 

업무 전 과정에서는 당연히 방송사의 지시를 받는다. 방송 프로그램은 작가의 개인 방송이 아니니까. 방송사 직원인 PD의 수정 지시나 컨펌 없이 방송은 나갈 수 없으니까. 엄연히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주된 인력임에도 불구하고 임금대장이나 인력과 관련된 공식 문서 내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는다. 이것이 정의를 이야기하는 방송사에서 일하는 방송작가들의 현실이다. 

▲사진=pixabay
▲사진=pixabay

눈 감고 입 닫을 수 있는 거대 권력인 방송사라는 벽에 더해, 작가들이 각자도생하는 프리랜서로 살아왔다는 점도 방송작가들의 열악한 처우 문제에 크게 한 몫 한다. 

코로나나 방송사 적자 등 온갖 이유로 방송 제작비는 늘 매번 줄어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작가의 임금이 삭감되고, 일자리가 없어진다. 작가 다섯 명이서 하던 일을 세 명이서 하게 되니 당연히 노동 환경은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 성격상 고연차가 맡아야 하는 롤을 임금 삭감을 위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의 저연차에게 맡기다 보니 당연히 작가의 업무는 과중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임금이 낮고 처우가 열악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들어와 그 자리를 채운다. 낮은 임금은 프리랜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늠하는 하나의 지표다. 기획안을 무료로 써주거나, PD 업무를 하나하나 도맡아오기 시작하면 옆에 있는 작가도 그렇게 일해야 한다. 개인을 탓할 수 없다. 시스템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열악해진 자리의 작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나가도, 누군가는 또 들어와 자리를 메운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개인의 문제제기는 힘을 잃는다. 

이렇게 방송작가 노동 현장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든 것은 당연히 방송사다. 제대로 된 임금 파이를 만들지 않으니 을끼리 서로 경쟁하고 눈치 보게 만든다. 때문에 작가들이 노조로 모이는 길은 참으로 멀고 지난하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랜서인 작가들이 처우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모여서 함께 한 목소리로 요구하는 것이다. 

▲지난 3월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 사진=미디어오늘
▲지난 3월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 사진=미디어오늘

방송작가들처럼 힘없는 노동자들이 모여서 쓸 수 있는 ‘치트키’가 있다. 바로 ‘교섭’이다. 교섭이란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 근로조건 등에 관한 합의를 만들어낼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협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누릴 수 있는 헌법상 권리다. 이 교섭의 주체는 노동자 개인이 아닌 노동조합이다. 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사용자는 그 자체로 부당노동행위로 처벌 받는다. 

수 십 년째 동결인 작가들의 임금을 올리고, 임금 인상 기준을 만들고, 기획기간에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아무런 기준 없이 도맡았던 업무를 정돈하고, 말도 안 되는 장시간 노동을 멈추고, 수당 지급 체계를 마련하는 등의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누구도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사에서 고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문제제기하는 개인을 부적응자 취급하고 내보내고 입 막으면 그만이었다. 방송사와의 ‘교섭’은 작가 처우를 개선하고 임금을 올릴 수 있는 실질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교섭의 상대방은 당연히 방송사다.

방송사는 늘 방송 비정규직 문제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방송작가유니온의 줄기찬 교섭 요구에 방송사는 언론노조와 산별협약을 맺으며 방송작가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방송작가특별협의체’를 꾸렸다. 취재작가 및 지역작가 처우개선과 계약서 불공정 조항 개선이 주된 의제였다. 방송작가들의 의제를 다룬 사실상의 첫 번째 산별협약이었고, 큰 기대에 부풀었지만 사실상 협의는 중단된 상태다. 

▲ⓒ방송작가지부
▲ⓒ방송작가지부

MBC에서 일하던 방송작가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을 인정받아도 MBC는 행정소송으로 일관한다. 앞에서는 협의하고 함께 풀어가자고 하면서 뒤에서는 작가 근로자성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버티고 있다. 현재 KBS, MBC, SBS 방송3사에서는 방송작가를 대상으로 한 근로감독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작가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프리랜서의 명단을 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작가의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방송사는 제대로 된 명단조차 제출하지 않는다. 작가들에게 거짓 진술을 에둘러 종용하기도 한다. 프리랜서 작가들에게는 엄청난 압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각자도생 제로섬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는 방송사와의 제대로 된 교섭만이 해답이다. 

많은 특수고용 노동자의 조직이 그렇듯, 법적 근로자성을 인정받기 어렵고 부당노동행위 구제도 어렵기 때문에 방송사의 교섭 해태에 대응하기 벅차다. 하지만 방송작가유니온은 실체를 가진 노동조합이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도 인정받았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올해부터 지상파방송사 재허가 조건에 ‘비정규직 처우개선’ 사항을 반영하기로 했다. 방통위 요구에 따른 ‘비정규직 처우개선’이 요식행위가 아닌 실효성 있는 처우개선이 되기 위해서라도, 방송사는 방송계 대표적 비정규직 노동조합인 방송작가유니온과의 교섭에 적극 나서고 방송작가의 실질적 사용자가 방송사임을 인정해야 한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문화예술노동연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이 3월19일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문화예술노동연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이 3월19일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결국 많은 작가들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달라고. 지금과 같은 제로섬 게임은 거부한다고. 노동조합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의 중핵적 권리인 ‘교섭’으로 ‘협약안’을 만들어 관철시키는 것. 이것이 작가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을 교섭으로 풀어갈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비정규직 쥐어짜서 만들어내는 방송에 시청자들은 감동하지 않는다. 방송작가와 같은 방송 비정규직과의 상생이 방송사의 유일한 해답이고, 이는 진정성 있는 교섭으로 풀어가야 한다. 노조라는 우산 아래 모인 우리는 옆에 있는 동료의 손을 잡고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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