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을 때 언론이 뭘 할 수 있겠느냐며 무력감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도 유튜브가 갖지 못한 언론만의 '장기'가 분명히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름붙이기 능력’이다. 이 사건을 도대체 뭐라고 부를지 명칭을 결정하는 능력은 언론이 갑이라는 말이다. 그게 어떻다고? 예를 들어보자.

14년전인 2007년 12월7일 아침 7시경, 태안 앞바다에 검은 기름이 쏟아졌다. 다리 건설에 쓰이던 크레인 부선이 유조선과 충돌해 이틀에 걸쳐 약 7만9천배럴의 원유가 유출됐다. 지역 경제 회복을 위해 빨라야 10년이 걸린다는 대형 사고가 터진 거다. 이 사건을 언론은 뭐라고 불렀을까?

국제 관행에 따르면 사건 명 앞에 기름을 싣고 있던 유조선의 이름을 붙인다. 가해 선박의 이름을 추가하기도 한다. 충돌 선박은 ‘삼성 1호’였고 유조선은 ‘허베이 스피릿호’였으니 이 사고를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호 사고’로 부르는 게 맞다. 그러나 언론은 ‘태안’ 기름 유출 사고로 불렀다. 기름 유출의 피해자(태안)가 졸지에 ‘기름 오염의 대명사’가 된 거다. 때문에 사고 이전에 잡힌 냉동 생선조차 팔리지 않는 등 태안은 추가 피해를 입었다. 반면 가해 선박의 책임은 가려졌고 사고는 마치 인재가 아닌 천재지변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처럼 언론이 사건 명칭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학자들은 이를 ‘용어 선택의 프레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 2007년 12월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원유 해양 유출 사고로 기름띠가 인근 해안으로 확산돼 큰 피해가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12월9일 오전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민,관,군이 함께 방제 작업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 2007년 12월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원유 해양 유출 사고로 기름띠가 인근 해안으로 확산돼 큰 피해가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12월9일 오전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민,관,군이 함께 방제 작업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1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20대 대학생과 40대 50대 가장들이 수백 킬로그램 쇳덩이에 깔려 숨지는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고 있다. 지금도 곳곳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이 사고들을 우리는 뭐라고 이름 붙이고 있을까?

지난 6월3일 아침 7시30분경 벌어진 사고를 예로 들어보자. 평택시 고덕면의 삼성반도체 건설 현장,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짓는 이 현장에서 야광 조끼를 입고 도로 위에서 덤프트럭들에게 수신호를 주던 47세 남성이 뒤에서 오던 20톤 지게차의 거대한 바퀴에 깔렸다. 지게차 운전기사가 다급히 뛰어 나오고 119도 9분 만에 왔지만 남성은 이미 심정지 상태, 그는 삼성물산 협력업체 직원으로 일당 10만원을 받는 사실상 일용직이었다. 평택경찰서 교통과는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를, 형사과는 업무상과실치사혐의를 조사 중이다. 노동단체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 등 노동부가 원청업체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언론은 이 사고를 뭐라고 불렀을까?

① 지게차에 치여 작업자 사망… “공사장 교통 통제하다” (SBS 8시뉴스)
② 평택 공사장서 지게차 깔림 사고… 40대 작업자 숨져 (TV조선)
③ 평택 공사장서 지게차 깔림 사고… 50대 청소업체 직원 숨져 (YTN)
④ 평택 공사 현장 지게차 사고 50대 직원 숨져 (OBS 뉴스)
⑤ 평택 건설현장서 50대 작업자 지게차에 치여 숨져 (연합뉴스)

장소(삼성반도체 건설현장)도 원청업체(삼성물산)도 없이 그냥 ‘평택 지게차 사고’가 된거다. 우리 기업들도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ESG 경영,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 ‘좋은 기업’ 으로 거듭나려는 ‘ESG 열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다. 심층보도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렇게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① 삼성물산 건설 현장서 근로자 지게차에 깔려 사망… 회사는 ‘죄송’ (경기신문)
② 또 지게차 사고… 삼성 반도체 공장 현장 1명 사망 (KBS)
③ 삼성물산 건설 공사 현장서 지게차 깔려 숨졌는데 ‘일반 교통사고’? (한겨레)

▲ 6월4일 KBS뉴스 보도 갈무리.
▲ 6월4일 KBS뉴스 보도 갈무리.

산업재해 사망사고의 대부분은 소규모 하청업체 직원들이다. 쇳덩이에 깔린 이선호씨도 컨베이어 벨트에 끼인 김용균씨도 그랬다. 이처럼 죽음이 ‘외주화’ 되기에 누더기 법안이란 오명 속에서도 여야 합의로 원청업체의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법이 통과되었건만 아직도 우리 언론은 법 제정 기본취지조차 살리지 못한 채 관행에 빠져있다. 지역 언론이 바꿔보자.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그것이 어느 사업장에서 일어난 건지 정확히 명시해보자. 기업은 어떤 식으로든 예방에 힘쓸 것이고 그것이 결국 우리 지역 좋은 기업을 만드는 ‘진짜 ESG’ 로 이어질 것이다.

[기사 수정 : 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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