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힘은 보통 선출되지 않는 자들에게 있다. 재벌총수, 언론사주, 국가 고위 관료 등이 그들이다. 요즘 삼성, 조중동, 검찰, 기재부, 감사원이 휘두르는 권력과 그들이 청와대나 집권당도 무시하며 공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더구나 이들은 긴밀하게 유착돼 있고, 회전문처럼 서로를 넘나든다.

검사장은 나중에 삼성이나 대형로펌으로 가고, 기재부 고위 관료는 나중에 재벌과 금융회사로 가고, 이런 자리들은 다시 거대정당의 공천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지배·권력 블록이 구성된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융합되고 조직되는 방식, 권력을 분배하는 방식,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방식, 강제와 폭력뿐만 아니라 설득과 동의를 통해서 대중을 통치하는 방식에 따라서 국가의 성격과 유형이 형성된다.

원래 한국사회는 매우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융합돼 있고, 강제와 폭력이 우선하는 지배방식과 국가형태였다. 그러나 87년과 이후 몇 차례의 대중저항에 직면하면서 그 성격과 유형이 변화해 왔고 권력기반도 확대돼 왔다. 국가와 자본의 상대적 자율성과 탄력성도 높아져 왔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는 진정한 권력자들의 여전한 힘, 그들이 자신들의 질서를 복원하는 회복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2016년 촛불과 같은 거대한 파도에 밀려서 그들은 일단 후퇴하고, 심지어 그 파도에 몸을 싣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 후퇴였을 뿐이고 언제든 다시 기존의 질서를 재확립할 기회를 노리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언제나 억압적 국가기구가 있다. 국가의 본질은 결국 ‘폭력의 합법적인 독점’, ‘무장한 인간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임기말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보여 준다. 진작부터 문재인 정부의 온건한 수준의 검찰개혁마저 거부하며 반대편에 서 있던 검찰은 ‘김학의 역사 바로잡기’(?)에 한참이고, 검찰 내부에서 검찰개혁에 동조하던 인사들에 대한 응징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검찰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주류언론은 별로 없었는데, 그나마 외로이 목소리를 내던 뉴스타파는 지금 총 9번, 모두 6억5천만원이라는 대대적 손배소송의 보복에 직면해 있다.

“소송이라는 것이 언론을 괴롭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법 전문가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기업에서 노조와 활동가들에게 제기하는 천문학적 손해배상 소송, 가압류와 일맥상통한다. 그들의 작전대로 됐다. 일단 귀찮고. 이단 돈이 많이 들고. 삼단 그래서 괴롭다.”- 김경래 뉴스타파 기자

[관련기사 : 뉴스타파) 현장에서-소송 폭탄 : <죄수와 검사>에 대처하는 검사들의 (뻔)뻔한 자세]

그러나 검찰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한국 국가의 핵심적인 폭력적 비밀경찰기구였던 국가정보원이 최근에 벌이고 있는 일이다. 최근 2주일 사이에만 국정원이 주도해 자행한 탄압을 보자. 4·27시대연구원 이정훈 연구위원에 대한 압수수색과 구속,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한 김승균 대표에 대한 압수수색, 청주지역 활동가 4명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압수수색, 범민련 원진욱 사무처장 등 2명에 대한 기소…

더구나 국정원은 최근 ‘탈북자 간첩 조작 사건에 규정 위반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정원 내부 인물로만 구성된 TF에서 피해자도 불러서 조사하지 않은 ‘셀프 조사'를 하더니 ‘면죄부 주기'로 마무리한 것이다. 장경욱 변호사가 비판하듯이 “이것은 향후에도 계속… 간첩조작을 하겠다는 선전포고”(https://newstapa.org/article/K1hoV)에 다름 아니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던 박지원이 국정원장이 됐어도, 국정원의 성격과 본질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이정훈 4·27시대연구원 위원은 소환 한번 없더니 갑자기 집으로 들어친 30여명의 국정원, 보안수사대에 의해 연행됐고 자택은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정훈 위원이 쓴 책들이 ‘북한을 찬양 고무’했고, 심지어 김정은의 지령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라는 혐의다. 이것은, 시작된지 열흘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국가보안법 폐지 10만 입법청원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 발의를 준비하던 민주당, 정의당 의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 2016년 10월 국가정보원 로비 모습. ⓒ 연합뉴스
▲ 2016년 10월 국가정보원 로비 모습. ⓒ 연합뉴스

이 과정에서 사상, 표현, 출판, 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인 기본권이나 인권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원진욱 범민련 사무처장이 국가정보원과 공안 경찰들은 당한 인권유린을 보면 참담한 수준이다. 그의 휴대전화, 사무실 전화·팩스, 이메일 등 모든 통신수단에 대해 감청, 통화내역 조회, 대화내용 녹음, 사진 채증, 영상녹화와 녹음, CCTV 영상 확보, 실시간 위치추적, 미행, 은행계좌 압수수색, 금융거래내역 조회가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개혁정부 정권말기에는 꼭 이처럼 국정원이 주도한 국가보안법 조직 사건이 터지곤 했다.

특히 이런 사건은 항상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북한 정권과 체제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들을 겨냥했다. ‘북한은 괴물같은 사회인데 그런 사회를 좋게 보는 사람들도 괴물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하다’는 프레임으로 진보진영을 위축, 분열시키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어느 정도 먹혀든다는 것이다. 사상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하던 사람들도 북한 문제나 종북몰이 앞에서는 멈칫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석기 의원이 8년이나 감옥에 있지만, 진보 정치인들도 그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잘 내지 않았다.

이것을 얼마 전 ‘문재인은 북한의 개이고 빨갱이’라는 전단을 뿌렸다가 고소당한 ‘청년’(그는 사실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극우유튜버이자 국힘당 정치 활동가였다)의 문제와 비교해 보자. 전 사회와 대부분의 언론이 비분강개했고 진보적 정치인과 지식인들까지 그의 ‘표현의 자유’를 방어했다. 여기서 그 ‘청년’의 주장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를 ‘종북주사파’라고 공격한 변희재도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한국사회에서 종북몰이와 종북 혐오표현으로 누군가를 공격할 자유와 권리는 존재하지만 종북몰이와 종북 혐오표현을 거부할 자유와 권리는 별로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지지하지 않는 잘못된 생각이라도 그것을 표현할 자유를 가로막거나 법적으로 공격받는 것에서는 방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고 큰 틀에서 동의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조적이고 이중적인 반응이 나타나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더구나 종북몰이는 표현의 자유보다는 실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혐오표현의 성격이 더 크다. 이념대립으로 전쟁과 학살까지 겪은 한국 역사, 아직도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에 기반한 구조와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한국사회에서 그 위험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미 ‘종북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난 종북몰이의 잡종적 확대 가능성은 최근에 반페미니즘적 백래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초등교사들로 구성된 급진 좌경 페미니스트 지하조직이 조직적으로 페미니즘 세뇌 활동을 해 왔다’는 국민청원이 수십만 명의 청원을 받아서 경찰 수사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차별과 혐오는 그 토대, 구조, 세력에서 연결돼 있다.

예컨대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발의나 논의조차 돼지 못한 ‘단절의 10년’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다. 그 ‘단절의 10년’을 이야기할 때 보통 2013년 민주당 김한길 의원의 발의와 자진 철회가 등장한다. 우파와 혐오세력의 공격에 굴복했던 김한길 의원은 요즘도 차별금지법을 다루는 방송에 출현해 그 시절을 돌아보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2012년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의 발의였다. 통합진보당과 김재연 의원은 결코 이 법안을 철회한 적도 내용을 타협한 적도 없다. 그러나 2012년부터 시작돼 2013년에 그 절정에 달하고 2014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으로 이어진 종북몰이 속에서 차별금지법 논의도 함께 사라졌고 그 법안은 2016년 자동폐기됐다. 이것은 차별금지법 ‘단절의 10년’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지점이지만, 오늘날 흔히 망각되고 있는 지점이다.

그 점에서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을 서로 연결시키고 함께 힘을 모으려는 움직임은 너무나 반갑고 고무적이다. 차별과 혐오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없어져야 할 것이 국가보안법이고 가장 필요한 것은 차별금지법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 10만 청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을 발판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10만 청원도 성공시켜 내는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끝까지 함께 손을 잡고 이뤄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차별금지법 제정하자! → https://equalityact.kr/1000000together/
※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 바로가기 → https://bit.ly/equality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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