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죽음. 다른 관심. 300kg 쇳덩이에 깔려… 눈 감지 못한 청년 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지난 4월 새 두 청년 죽음이 있었다. 평택항 항만 부두에서 작업하다 300kg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4월22일 숨진 23살 이선호씨와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4월24일 실종돼 닷새 만에 숨진 채 발견된 22살 손정민씨다.

죽음 경중을 따질 수 없을진대, 두 청년에 대한 세상 관심은 달랐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를 이용해 지난 한 달간 53개 매체 보도 건수를 집계한 결과, 손정민씨 관련 보도는 1708건이었지만 이선호씨 관련 보도는 460건에 불과했다.

보도 시점도 달랐다. 언론은 시신이 발견되자마자 손정민씨 보도를 연이어 쏟아냈지만, 이선호씨 죽음은 4월24일 단신 보도 이후 거의 2주가 지나서야 언론 관심을 받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지적한 대로, 같은 죽음에 다른 관심이었다.

▲ 이선호씨 관련 보도. 그래프=김수지 기자 제공
▲ 이선호씨 관련 보도. 그래프=김수지 기자 제공
▲ 손정민씨 관련 보도. 그래프=김수지 기자 제공
▲ 손정민씨 관련 보도. 그래프=김수지 기자 제공

이 글에서는 왜 언론이 손정민씨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보다 왜 언론이 이선호씨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선호씨 죽음 전에, 김용균씨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도, 부산신항에서 지게차에 깔려 숨진 이가 있었다. 지난해만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가 882명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이러한 산업재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첫째, ‘약자’에 공감할 수 없는 구성원 문제가 있다. 대부분 기자는 대학을 재학·졸업해 일정 정도 훈련을 거쳐 언론사에 입사한다. 그렇게 기자가 되면, 일종의 ‘전문직’처럼 사회 활동을 하게 된다. 단언할 순 없지만, 삶 전반에서 약자의 경험을 하지 못한 이들 다수가 언론사 구성원이 된다. 오랜 악습으로 취급돼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른바 하리꼬미(수습기자 때 경찰서에서 숙식하며 진행하는 취재)도 “기자가 약자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명목으로 유지돼 왔다. 하리꼬미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기자는 약자가 되기 어렵다’는 언론 내부 인식을 드러내는 관행이었다. 내 이야기가 아닌 문제에 기자가 관심을 두긴 어려울 것이다.

둘째, 밥그릇 문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신문방송 모니터에 따르면, 보수 성향 매체와 경제지는 산업재해 사고를 계속 외면해오며 외려 ‘기업 경영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우면 안 된다’는 친기업적 시각을 보였다. 산업재해는 기업에 감추고픈 치부다. 기업 광고비에 의존하는 기생업종으로서의 언론은, 산업재해를 ‘왜소화’할수록 돈 벌기 편해진다. 언론은 노동자 목소리를 듣기보다 먹고 살기 편한 방법을 택했다.

셋째, 사람들 관심이 ‘약자’에 닿아있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다. 언론은 사람들 관심을 좇는다. 손정민씨 죽음에 사람들 관심이 쏠리자 언론이 무수히 보도를 쏟아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약자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약자 목소리에 관심을 두긴 어렵다. 자기 이야기가 아닌 것에 지속적 관심을 두는 건 ‘약자 감수성’이 뛰어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진짜 문제는 언론이 이러한 기울어진 관심을 뒤집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사람들 관심을 그대로 따라갔다는 데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언론이 이윤 추구를 위해 선동하고 기득권층만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으로 ‘허친스위원회’가 꾸려졌고, 이 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에서 ‘사회적 책임이론’이 탄생했다. 이 보고서엔 ‘언론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대표적인 의견과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강자뿐만 아니라 약자 목소리 또한 골고루 담아야 한다는 언론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 평택항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진 20대 청년 노동자 고(故) 이선호 씨의 부친 이재훈 씨가 5월13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청 앞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 평택항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진 20대 청년 노동자 고(故) 이선호 씨의 부친 이재훈 씨가 5월13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청 앞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굳이 역사적으로 정립된 언론 역할을 다시 짚지 않아도 언론이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야 할 이유는 또 있다. 강자는 목소리가 작아도 들어주는 이가 많고, 약자는 목소리가 커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

약자의 이야기를 언론이 ‘기계적’으로라도 다뤄주길 바라는 건 그래서다. 여러 통로를 통해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강자와 달리 사회적 약자가 기댈 건 언론 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기울어진 힘의 추를 약자로 조금이나마 옮길 수 있는 것도 언론 밖에 없다. 언론에 힘을 쥐여 준 이유가 사회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언론이 수많은 이선호씨 이야기를 담아주길 바란다. 언론이 약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앞서 얘기한 무수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결국 무엇을 쓸 건지는 간단한 ‘선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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