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8일. MBC 카메라 기자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MBC 블랙리스트’ 문건을 폭로했다. 회사 충성도와 노조 참여도에 따라 카메라 기자 65명을 4등급으로 나누고 그 성향을 평가한 사내 문건(‘카메라기자 성향 분석표’, ‘요주의 인물 성향’)을 입수해 공개했다.

4등급은 ‘☆☆, ○, △, X’로 분류됐다. 대표적으로 하위 등급인 ‘△’ 표시는 “언론노조 영향력에 있는 회색분자들”을 구분하기 위한 표식, ‘X’ 표시는 “지난 파업(2012년)의 주동 계층으로 현 체제 붕괴를 원하는 이들”에 대한 분류 표식이었다.

이 문건은 카메라 기자 개개인에 대해서도 “업무 능력이 부족하고 게으른 성향과 개인 욕심이 많아 기회 시 변절할 인원”이라거나 “대세에 따르는 우유부단함의 회색분자들”, “무능과 태만으로 존재감이 없는 인물” 등으로 철저하게 구분했다. 당시 문건이 공개되자 ‘쇠고기 등급 나누듯 반인권적인 블랙리스트’라는 비판이 거셌다.

문건이 공개된 2017년 8월은 문재인 정부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으나 MBC의 경우 김장겸 사장 체제 하에서 보도·시사 프로그램 불공정성이 계속되던 때였다. 카메라 기자들의 블랙리스트 문건 공개는 그해 9월 ‘MBC 정상화’를 바라는 MBC 언론인들 총파업에 큰 동력이었다. 김장겸 MBC 사장은 해임되고 나서야 총파업은 마무리됐다.

▲ 2017년 8월8일 당시 김연국 언론노조 MBC본부장이 기자회견에서 ‘카메라기자 성향 분석표’와 ‘요주의 인물 성향’ 문건을 폭로한 뒤 설명하고 있다. 이 문건들로 인해 MBC는 블랙리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사진=미디어오늘
▲ 2017년 8월8일 당시 김연국 언론노조 MBC본부장이 기자회견에서 ‘카메라기자 성향 분석표’와 ‘요주의 인물 성향’ 문건을 폭로한 뒤 설명하고 있다. 이 문건들로 인해 MBC는 블랙리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사진=미디어오늘

문건 작성자는 누구?

문건 작성자는 MBC 카메라 기자이자 제3노조 조합원인 권지호씨였다. 제3노조는 정치적으로 제1노조인 언론노조 MBC본부와 적대 관계에 있던 노조였다. 권씨는 2004년 12월 MBC에 입사해 특종상, 우수상, 7차례의 격려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건은 2013년 7월 처음 작성됐다.

권씨는 문건이 폭로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1노조(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소속 조합원 중에 특히 비겁한 행동을 보이는 자들을 구분하고 싶어서 문건을 만들었고 함께 제3노조(MBC노동조합)에 참여한 친한 카메라 기자 2명에게 이 문건을 보여줬다”는 취지로 글을 남겼다.

MBC 감사국은 2018년 1월8일부터 3월22일까지 ‘MBC 블랙리스트 및 부당노동행위 관련 특별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감사국은 권씨가 이 사건 문건 작성·실행에 관여했다고 판단하고 MBC 인사위원회에 징계를 요청했다. MBC 인사위는 5월18일 권씨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징계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동료 카메라 기자들을 ‘격리대상’, ‘방출대상’, ‘주요관찰대상’, ‘회유가능’ 등 4등급으로 분류해 작성하고, 자신(권씨)이 작성한 ‘블랙리스트’가 반영된 인사안을 박용찬 취재센터장에게 메일로 보고해 결과적으로 실행되게 했다.”

“객관적 평가 자료나 합리적 근거도 없이 특정 대상에 대한 충성도나 노조 성향을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임의로 블랙리스트를 작성·전달함으로써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불법 행위를 저지름은 물론, 당사자들에게 인사상 불이익한 처분이 가해지도록 하는 부당노동행위의 원인을 제공해 합리적 인사관리를 방해하고, 직장 질서를 문란케 하는 심대한 해사 행위를 했다.”

여기까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진 ‘MBC 블랙리스트 문건 사태’다.

▲ MBC 사원 개개인 등급을 매겨 각종 인사 평가와 인력 배치 등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MBC판 블랙리스트’가 2017년 8월 노조에 의해 폭로돼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요주의 인물 성향’이라는 문건에는 ✕, △, ○ 각 등급별로 기자들에 대한 개인별 평가를 상세히 적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 MBC 사원 개개인 등급을 매겨 각종 인사 평가와 인력 배치 등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MBC판 블랙리스트’가 2017년 8월 노조에 의해 폭로돼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요주의 인물 성향’이라는 문건에는 ✕, △, ○ 각 등급별로 기자들에 대한 개인별 평가를 상세히 적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여전히 진행 중인 해고무효소송

사건은 일단락된 듯했지만 소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권씨는 2018년 6월 MBC를 상대로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8월 1심 법원은 권씨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해고는 적법하다는 판결이다. 권씨가 패소하고 MBC가 승소했다.

반면, 2심인 서울고법은 지난해 8월 권씨에 대한 해고는 무효라며 권씨 손을 들어줬다. 1심 결과를 뒤집은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4월29일 2심을 다시 뒤집었다. 대법원은 원심(2심) 판결 중 MBC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라며 원심법원(고법)에 환송했다.

무엇이 재판부 판단을 갈랐을까. 판결문을 살펴보니 징계 사유 존부에 대한 판단이다. 재판부는 징계 사유를 3가지로 나눈다. ⓛ권씨가 이 사건 문건(블랙리스트 문건)과 이를 반영한 인사 이동안을 작성해 그 가운데 인사 이동안을 인사권자인 박용찬에게 보고함으로써 복무 질서를 어지럽게 했고 ②인사 이동안에 따라 2014년 3월14일자 인사가 이뤄지게 함으로써 박용찬의 부당노동행위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③특정 인물들에 대한 명예훼손 내지 모욕적 내용이 포함돼 있는 이 사건 문건을 다른 사람과 공유함으로써 명예훼손죄 내지 모욕죄에 해당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권씨는 ⓛ 징계 사유에 “이 사건 문건은 MBC가 보유하고 있는 컴퓨터 내 파일을 출력한 것”이라며 “이 파일 최초 작성자는 내가 맞지만 여러 차례 수정된 흔적이 있기 때문에 내게 문건 작성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②와 ③ 사유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1심 재판부는 ⓛ, ③ 징계 사유가 인정된다며 해고는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반면 2심은 ⓛ만 인정되고 해고는 징계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조치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 ③ 징계 사유가 인정되기 때문에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 MBC 사원 개개인 등급을 매겨 각종 인사 평가와 인력 배치 등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MBC판 블랙리스트’가 2017년 8월 노조에 의해 폭로돼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요주의 인물 성향’이라는 문건에는 ✕, △, ○ 각 등급별로 기자들에 대한 개인별 평가를 상세히 적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 MBC 사원 개개인 등급을 매겨 각종 인사 평가와 인력 배치 등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MBC판 블랙리스트’가 2017년 8월 노조에 의해 폭로돼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요주의 인물 성향’이라는 문건에는 ✕, △, ○ 각 등급별로 기자들에 대한 개인별 평가를 상세히 적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1심 “권씨, 언론 자유의 본질 침해”

1심 재판부는 “② 징계 사유를 제외한 나머지 ⓛ, ③ 징계 사유만으로도 사회 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원고(권씨)에게 책임 있는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고, 이 사건 해임 처분이 객관적으로 명백히 부당해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은 것으로는 판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②에 관해서는 “박용찬이 원고와 공모해 이 사건 문건과 이를 반영한 인사 이동안을 작성한 다음 인사를 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다”고 했다. 블랙리스트 문건과 이를 반영한 인사안에 따라 실제 인사가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박용찬 전 센터장은 2013년 5월 MBC 보도국 취재센터장에 부임했고 보도국 소속 카메라 기자들에 대한 1차 인사를 결정한 권한을 가진 책임자였다. 박 전 센터장은 현재는 국민의힘 영등포을 당협위원장이다.

그럼에도 1심 재판부는 “원고(권씨)는 이 사건 문건을 개인적으로 보관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 문건 내용을 인사권자에게 전달해 인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비위 정도를 무겁게 평가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원고의 행위는 인사 제도에 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 직원에 대한 내부 고발도 아니며, 그저 누가 자신과 같은 정치적 성향과 회사 정책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같은 노조원으로 활동하는지, 누가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지를 기준으로 편을 가르고, 내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불이익을 주어서라도 순응하게 만들거나 퇴출시켜야 함을 피력한 행위다.”

“소위 블랙리스트는 그 명단에 오른 대상자에 대한 불이익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당시 권력을 잡고 있는 측의 특정한 정파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사상이나 양심을 형성하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고, 나아가 오히려 권력에 부합하는 사상이나 양심을 형성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스스로의 의문을 품게 해 내적 자기검열을 하게 함으로써 언론의 자유의 본질적인 영역을 침해한다.”

권씨가 자신의 동료를 “업무 능력이 부족하고 게으른 성향과 개인 욕심이 많아 기회 시 변절할 인원”, “극히 개인적인 성격으로 영향력 제로”, “무능하고 성실한 전형”, “대세에 따르는 우유부단함의 회색분자들”, “무능과 태만으로 존재감이 없는 인물”, “심각한 업무수행능력 부재” 등이라고 평가한 데 대해 재판부는 “사람의 품성, 덕행, 명성, 신용 등 인격적 가치에 대해 사회적으로 받는 객관적인 평가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한 뒤 “명예훼손에 해당하거나 표현 행위의 형식과 내용 등이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에 해당하는 행위로써 모욕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 2017년 8월8일 당시 권혁용 MBC영상기자회장이 언론노조 MBC본부가 입수해 공개한 ‘카메라기자 성향 분석표’와 ‘요주의 인물 성향’ 문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 2017년 8월8일 당시 권혁용 MBC영상기자회장이 언론노조 MBC본부가 입수해 공개한 ‘카메라기자 성향 분석표’와 ‘요주의 인물 성향’ 문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해고무효’ 2심 “권씨가 외부 유출한 바 없다”

2심인 서울고법은 ⓛ~③ 징계 사유 중 ⓛ만 인정했다. 권씨가 블랙리스트 문건을 친하게 지내는 2명의 카메라 기자에게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 내용이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이와 같은 전달 행위는 공연성을 결한 것으로서 명예훼손 내지 모욕의 불법 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다. 권씨는 2명의 동료 카메라 기자에게 문건 내용을 공유했을 뿐 그 외에 해당 문건을 내·외부에 유출한 바 없다는 것. 재판부는 ⓛ 징계사유 만으로 해고를 할 정도로 비위 행위가 중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해고처분은 징계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조치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결론이다.

2심은 “원고는 2012년 제1노조(언론노조 MBC본부) 주도의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1노조 소속 직원들로부터 소외되는 등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자 이들에 대한 분노, 배신감 등을 갖게 된 상태에서 그 원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 사건 문건 및 인사 이동안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원고는 이 사건 문건 및 인사 이동안의 작성 자체를 충분히 반성하고 있고 해고가 되기 전에 선후배 동료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고 싶었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고 했다.

반면, 대법원은 “원고(권씨)가 이 사건 문건과 이 사건 인사 이동안을 작성 및 보고하고 다른 직원들에게 전달한 행위는 상호 인격을 존중해 직장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한 MBC 사규를 위반한 행위로서 취업규칙에서 정한 징계사유에 해당하므로 ③징계사유가 인정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MBC 취업규칙에서 민·형사상 불법 행위만이 징계사유에 해당한다는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징계 규정을 그와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볼 만한 객관적이고 합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며 “그런데도 원고(권씨)의 비위 행위가 모욕죄 또는 명예훼손죄가 성립하기 위한 공연성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 불법 행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을 들어 ③징계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에는 징계 사유 해석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 2017년 8월8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언론노조 MBC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직 MBC영상기자회장 양동암 기자(오른쪽)와 나준영 기자가 발언했다. 사진=미디어오늘
▲ 2017년 8월8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언론노조 MBC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직 MBC영상기자회장 양동암 기자(오른쪽)와 나준영 기자가 발언했다. 사진=미디어오늘

현재 MBC 다니고 있는 권씨

대법원 판단은 MBC가 징계 사유로 밝힌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불법행위’를 ‘민·형사상 불법 행위나 범죄’로 좁게 해석하기보다 취업규칙 등 징계 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징계 사유 의미와 내용을 다소 넓게 적용·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권씨는 지난해 8월 해고무효 판결을 내린 2심에 따라 MBC에 복직한 상태다. 대법원이 사건을 파기환송함에 따라 추후 이어질 재판에 이목이 모인다. MBC 관계자는 12일 통화에서 “권씨는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다. 파기환송심 결과를 봐야 한다. 그 전까지는 직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권씨는 12일 미디어오늘 취재에 거듭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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