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송계 비정규직과 ‘무늬만 프리랜서’의 불안정 노동에 전환점이 될 판례가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법원과 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등에 불안정 고용과 열악한 처우에 문제 제기하며 노동자성 인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변화를 이끌어 낸 비정규직 당사자는 방송작가부터 편집감독, 프리랜서 PD, MD, 영상크리에이터 등에 이른다.

고 이재학 CJB청주방송 PD는 변화의 계기가 됐다. ‘무늬만 프리랜서’로 일하다 부당해고를 겪은 뒤 세상을 떠난 그의 죽음이 사회적 논란이 되면서, 방송계 비정규직 고용 관행에 타파 움직임이 일었다. 이후 청주방송 내 ‘또 다른 이재학’이라 불린 MD 정아무개씨가 부당해고 소송에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기 이르렀다. 중앙노동위원회의 MBC 보도국 작가 노동자성 판정은 ‘유기적으로 협업이 이뤄지는 방송업 특수성’에 기반해 노동자성을 가려야 한다는 기준을 남겼다.

최근 나온 유의미한 판결과 결정을 모아 소개한다. 이들 판례는 계약 형식 같은 업무의 외적이고 부수적 특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노동 과정에 근거해 노동자성을 따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방송계 특수성, 즉 유기적으로 협업이 이뤄지고 방송사 편성·제작에 따라 업무 내용이 결정되는 특성을 구체적으로 따졌다.

▲ 고 이재학 CJB청주방송 촬영팀의 촬영 모습
▲ 고 이재학 CJB청주방송 촬영팀의 촬영 모습

‘제2의 이재학’ 노동자 인정 “MD 파견 불법”, 청주방송 작가·PD·MD 12명도

지난 15일 ‘또 다른 이재학’이 법정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청주방송에서 파견 및 외주 비정규직 MD로 일해왔던 정아무개씨다. 서울북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김광섭)는 정씨가 청주방송을 상대로 낸 고용 의사 표시 소송에서 정씨의 청주방송 근로자 지위를 인정했다. MD가 파견법상 파견 허용 업종이 아님을 법적으로 확인한 첫 판결이다.

MD는 방송 프로그램, 각종 광고 등이 정해진 시간에 송출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방송운행 책임자’다. 방송사들은 본래 정규직이던 MD 직종을 비용 절감을 이유로 파견직을 남용하거나 외주화해왔다. 정씨 또한 청주방송과 1년 단위로 업무위탁계약을 맺는 용역회사의 직원이었다. 정씨는 2018년 말 청주방송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계약이 일방 종료됐다.

▲ MD 직군은 방송 운행을 책임지는 필수 인력이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력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늘어났다. MD가 일하는 주조정실 자료사진
▲ MD 직군은 방송 운행을 책임지는 필수 인력이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력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늘어났다. MD가 일하는 주조정실 자료사진

법원은 정씨가 청주방송 소속 노동자와 하나의 집단으로 공동작업해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MD 업무는 구 파견법 4조1항에 따른 근로자파견대상 업무가 아니므로, 피고가 2015년 4월11일 이 사건 파견계약에 기초해 원고를 파견받아 MD업무에 종사하게 한 것은 불법파견”이라고 판시했다.

한편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청주지청은 지난해 말부터 지난 3월까지 청주방송을 대상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프리랜서 작가와 PD, 용역업체 소속 MD의 노동자성을 공식 확인했다. 비정규직 21명의 근로 실태를 조사해 프리랜서 작가 5명과 PD 3명, 용역업체의 MD 4명 등 12명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또 청주방송이 이들을 사용하며 파견법, 근로기준법 등을 위반한 데에 시정지시를 내리기로 했다.

[관련 기사 : 청주방송 ‘또 다른 이재학’ 불법파견 인정받아 승소]

보도국 방송작가 첫 법적 노동자 인정

‘무늬만 프리랜서’인 보도국 방송작가의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도 처음 인정됐다. 지난해 6월 MBC ‘뉴스투데이’에서 프로그램 개편 등을 이유로 계약해지를 통보받은 10년 경력의 작가 2명은 지난달 19일 중노위에서 노동자로 인정 받았다. 2002년 마산MBC 구성작가들이 중노위로부터 ‘노조법상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뒤, 200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다시 뒤집힌 지 20여년 만의 일이다.

중노위는 방송업 특수성에 기반해 MBC의 사용자성 여부를 구체적으로 따졌다.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행사하고 업무 내용과 근무 장소, 시간을 지정하는지 등을 심문하는 한 근로제공이 계속적이고 전속적인지, 당사자가 독립 사업을 영위하는지, 보수의 성격이 근로 제공의 대가인지를 가렸다.

중노위는 “총괄 PD가 아이템 변경을 지시하고 순서를 다시 정하기도 했다. 특히 (회사는) 신문사 정치 성향을 고려해 특정 신문사의 기사가 제일 먼저 방송되지 않도록 하고 아이템 개수도 미리 정해졌다”며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인정했다.

▲ 이번 사건 신청인 2명 중 1명인 방송작가 ㄱ씨 근무 당시 모습
▲ 이번 사건 신청인 2명 중 1명인 방송작가 ㄱ씨 근무 당시 모습

MBC 측이 “작가가 최초 아이템을 골랐고 원고도 자율로 썼다. 업무 재량권이 있다”고 주장한 데에 “그 정도 재량은 매우 단순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보조원이 아니고서는 일반 근로자에게도 통상 부여된다”고 일축했다. MBC 측은 근무시간과 장소를 지시한 적 없다고 주장했으나, 중노위는 뉴스 생방송 특성상 제작진과 유기적 협업 때문에 근무시간은 사실상 정해졌다고 밝혔다.

김유경 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중노위 판정문은 기존 대법원의 방송업종 노동자성 인정 판결들과 같이 ‘방송업 특수성’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 인정의 가장 강력한 증거로 채택했다”며 “사용자(방송사)가 작가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내세워 온 ‘재량’, ‘창작’이라는 도식이 허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신청인 작가들 주장을 100% 인용하면서 명확히 재확인했다”고 평했다.

▲지난달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 사진=미디어오늘
▲지난달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 사진=미디어오늘

[관련 기사 : 문화방송 부당해고 구제 중노위 판정서가 ‘역사적’인 이유]

‘프리랜서’ 편집감독도 노동자로 산재 인정

2015년 MBC 드라마를 편집하다 숨진 드라마 편집감독 박아무개씨도 또다른 ‘무늬만 프리랜서’다. 그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숨진 지 5년 뒤인 2020년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법원은 박씨가 프리랜서라며 산재 신청을 기각한 근로복지공단 처분을 “임금을 목적으로 사용종속관계에 있는 근로자”라며 뒤집었다.

박씨는 2015년 3~8월 방영한 MBC 드라마 ‘여왕의 꽃’ 편집감독이었다. 드라마 종영 4주 전 MBC 숙직실에서 쓰러져 뇌경색으로 숨졌다. 유족은 2019년 산재를 주장하며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자유직업소득자(프리랜서)로서 제작사 복무규정이나 업무지시에 따르지 않고, 근무시간과 장소에 제약이 없었으며, 보조편집자를 채용해 업무를 시작했으므로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유족은 소송을 제기했다.

▲ 2015년 3~8월 방영된 MBC 드라마 ‘여왕의 꽃’. 사진=MBC
▲ 2015년 3~8월 방영된 MBC 드라마 ‘여왕의 꽃’. 사진=MBC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김국현 재판장)는 지난해 8월 “비록 계약이 업무 위탁 형식을 취했으나 망인은 임금을 목적으로 외주제작사와 사용종속관계에 있는 근로자라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판례에서도 박씨가 “독립적으로 드라마 완성 등을 정할 수 없는” 방송업 특성이 드러났다. 법원은 “MBC는 제작사에 드라마 제작에 관한 구체적 지시를 하고, 제작사는 드라마 제작을 제3자에게 위탁할 수 없으며 박씨는 독립적으로 드라마 완성 등을 정할 수 없는 편집을 담당했다”며 “박씨는 연출자 지시에 따라야 하고, 업무 결과를 연출자에게 보고하며 필요에 따라 제작사에도 보고해야 했다”고 했다.

또 근무 시간과 장소가 제작사와의 계약에 구속됐고, 업무의 계속성(근속)과 전속성도 인정했다. 박씨가 제작사 취업규칙을 적용받거나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편집보조 인력을 뒀던 사정은 ‘계약상’ 프리랜서라는 데서 오는 특성이므로 이를 근거로 노동자가 아니라고 단정하기 부족하다고 했다.

[관련 기사 : 드라마 외주제작사 편집자 사망 산재로 인정받다]

방송사 뉴미디어 크리에이터에 거듭 퇴직금 인정

뉴미디어계에서도 영상 크리에이터 등 프리랜서의 노동자성 인정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CBS 뉴미디어 채널 씨리얼에서 이른바 ‘상근 프리랜서’로 2년 가까이 일해온 A씨는 2018년 CBS에 퇴직금을 요구하는 진정을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제기했다.

서울노동청 근로감독관은 당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한 CBS 관계자에게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거나 “CBS에서 이런 문제가 잦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이어 같은 해 1년 3개월 일한 영상 크리에이터 B씨도 퇴직금을 신청했고, 노동청은 재차 B씨 손을 들어줬다. 2017년부터 크리에이터 처우개선을 위한 노사 TF를 가동해온 CBS는 2019년께부터 채용형태를 CBS 직속 ‘연봉계약 기간제 계약직’으로 바꿨다.

[관련 기사 : 뉴미디어 노동자 ‘안녕하신가요’]

▲왼쪽 위부터 KBS·SBS·CBS·중앙일보 뉴미디어 브랜드 크랩, 디지털뉴스랩, 씨리얼, 헤이뉴스 로고
▲왼쪽 위부터 KBS·SBS·CBS·중앙일보 뉴미디어 브랜드 크랩, 디지털뉴스랩, 씨리얼, 헤이뉴스 로고

“동일노동 차별임금” 대전MBC·YTN 무기계약직 차별인정

기자·PD가 아닌 직종을 부차적 노동 및 주변부 노동으로 나누는 구조에 대한 비판도 공론화하고 있다. 언론사 무기계약직들이 ‘동일가치 노동-동일임금’을 주장하며 낸 문제 제기가 법원과 노동위원회에서 잇달아 인정받으면서다.

YTN 소속 무기계약직 그래픽 디자이너 박아무개씨는 지난해 7월 서울지노위에 호봉직(분), 일반직, 연봉직으로 나뉘는 내부 차별 구조에 시정을 신청했다. YTN에선 3개 직분을 근거로 인사나 처우 규정이 각각 다르게 적용했다. 무기계약직인 연봉직은 호봉직의 50~70% 수준을 받았다. 그러나 그래픽 디자인을 맡는 호봉직과 연봉직, ‘프리랜서’ 직원들은 한데 섞여 동일한 일을 했다.

서울지노위는 그래픽 디자이너 무기계약직 사례가 차별이라고 밝혔다. 서울지노위는 “유사한 업무를 했는지는 근로자가 실제 수행한 일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업무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거나 업무 범위나 책임 권한 등이 다소 다르더라도 업무 내용에 본질적 차이가 없으면 동종·유사 업무에 종사한다고 봐야 한다”며 “과거 입직 경로, 향후 경력 관리 차이를 가지고 업무 간 유사성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 YTN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급여 명세서 비교. 직분 간 급여로 지급되는 수당, 상여금이 다르다. 디자인=안혜나 기자
▲ YTN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급여 명세서 비교. 직분 간 급여로 지급되는 수당, 상여금이 다르다. 디자인=안혜나 기자

[관련 기사 : YTN 계약직 “동일노동, 차등임금은 차별” 지노위 승소]

대전MBC 계약직 12명이 2013년 제기한 소송은 6년 후 대법원 판례를 남겼다. 대전MBC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던 A씨 등은 기간제법에 따라 2010~2011년 사이 직접고용됐으나, 무기계약직 형태였다. 회사는 이들에게 정규직 취업규칙이 아닌 ‘계약직 운영규정’을 적용했다. 기본급과 상여금은 정규직의 80% 수준만 받았다. 근속수당이 없었고, 2012년 5월 이후 정기 호봉승급도 없었다. 이들은 정규직과 같은 부서에서 같은 직책을 담당하며 일했다. 이들의 직종은 카메라맨과 방송기술, 미술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법원은 2019년 12월 무기계약직에도 동종·유사 업무의 정규직이 적용받는 취업규칙을 적용해야 한다며 2심을 파기환송했다. 앞서 2심은 무기계약직과 정규직이 ‘입직 경로와 업무 책임이 다르다’는 이유로 유사 집단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동일한 부서에서 같은 직책을 담당하며 근로를 제공하는 정규직 근로자와 비교해 업무 내용과 범위, 질이나 양 등 제반 측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또 “대전MBC는 2007년 기간제법 시행 이후 무기계약직 직원의 취업규칙을 별도로 만든 적이 없으므로 이들에게 정규직과 동일한 취업규칙이 적용된다고 봐야 하고, 이에 미달하는 처우를 정한 고용계약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인권위, 여성 아나운서만 ‘프리랜서’ 채용에 “무늬만 프리, 실질은 노동자”

방송사들이 아나운서 중 여성만 프리랜서 비정규직으로 채용해온 관행에도 이들을 정규직화하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6월 유지은 아나운서를 비롯한 여성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을 회사 직속 노동자로 판단하고 대전MBC에 정규직 전환하라고 권고했다. 유 아나운서 등 2명이 인권위에 진정한 지 1년 만으로, 피해 당사자가 재직 중 ‘성별 분리 채용’ 문제를 공론화한 첫 사례다.

인권위는 대전MBC에 성차별 채용 관행을 해소할 대책을 마련하라고도 권고했다. 대전MBC 대주주인 MBC본사에는 전국 계열사 채용 현황을 실태조사한 뒤 성차별 시정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다.

▲ 유지은 대전MBC 아나운서가 2019년 10월4일 세종시 고용노동부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동부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채용 성차별 경험과 진정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제공=길바닥 저널리스트
▲ 유지은 대전MBC 아나운서가 2019년 10월4일 세종시 고용노동부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동부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채용 성차별 경험과 진정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제공=길바닥 저널리스트

인권위 결정문은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전MBC에) 신규 채용된 정규직 아나운서 4명이 모두 남성이고, 계약직 15명과 프리랜서 5명 등 비정규직에는 예외 없이 여성이 채용된 것은 오랜 기간 지속된 성차별 채용 관행의 결과”라며 “진정인들의 업무 내용 및 수행 방식을 봐도 진정인들은 형식상 프리랜서일 뿐, 사실상 근로자로서 남성 정규직 아나운서와 동일 업무를 수행했고 실질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아나운서라는 직종에서 나타나는 여성노동의 성격이 지속성과 전문성 축적보다는 우선 소비하기 좋은 젊은 여성의 필요성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채용 성차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밝혔다.

▲ 유지은 아나운서 진정인이 2019년 인권위 진정 당시 제출한 지역 MBC 성별 아나운서 채용성차별 현황
▲ 유지은 아나운서 진정인이 2019년 인권위 진정 당시 제출한 지역 MBC 성별 아나운서 채용성차별 현황

그러나 방송사들의 채용성차별 관행은 여전하다. 대전MBC는 유 아나운서를 지난해 11월 정규직 전환했지만 채용성차별 자체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TV에서 8년 간 ‘프리랜서’로 일하다 2018년 출산한 뒤 재계약이 일방 거부된 아나운서 A씨는 지난해 11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관련 기사 : 채용 성차별 시정권고 MBC본사 찾아 “부끄러운 언론사로 남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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