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바우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를 꼽으라면 한국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시민에게 일정 액수를 바우처(쿠폰) 형태로 주면 시민은 자신이 응원하는 언론에 후원하는 아이디어로 미국 등에서 논의가 나오긴 했으나 아직 미디어 바우처 제도를 시행하는 국가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선 당장 입법논의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ABC협회 부수 조작 논란으로 연간 1조 원 규모의 정부 광고 집행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뤄지며 미디어 바우처 논의는 여러 갈래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지난 22일 방송된 TBS 미디어비평프로그램 ‘정준희의 해시태그’에 출연한 송현주 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는 “정부광고 실체는 정부가 언론사에 주는 지원금”이라 주장하며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의제화한 미디어 바우처를 두고 “말 많은 유료부수에 근거해 효과적이지 않은 정부 광고를 집행하느니, 시민들이 직접 언론을 선택해 바우처로 준다면 훨씬 더 투명하고 공정한 (정부 지원금) 집행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출처=한국언론진흥재단.
▲출처=한국언론진흥재단.

지난해 국내에서 미디어 바우처를 사실상 처음 소개한 김선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책임연구위원은 미디어 바우처 신청자를 받은 다음 성·연령·지역 할당을 바탕으로 무작위 선택을 통해 바우처 이용자를 선정, 우선 시범사업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이 각 언론사에 보낸 미디어바우처 액수의 비율만큼 1조원 수준의 정부광고 예산을 배분하자는 입장이다.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정부광고 예산의 절반 수준인 5000억원 가량을 미디어바우처로 돌려 소위 ‘공영 포털’ 가입자에게 주자고 제안했다. 반면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정부 광고가 갖는 홍보효과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바우처 제도는 별도 예산으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언론 자유도에 비해 언론 신뢰도가 낮은 한국 사회에서 미디어 바우처는 언론개혁의 대안처럼 떠올랐다. 정준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는 미디어 바우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가리켜 “낮아진 기사의 품질로 언론 신뢰도가 하락했는데 언론의 먹고 사는 구조를 바꿔주면 품질이 나아질 것이라는 취지”라고 설명한 뒤 일련의 논의가 “적어도 기존 구조를 흔드는 데 도움 되어야 한다”며 “우리나라 언론 모형에 자극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정 교수 말대로 언론 모형에까지 자극을 받으려면, ‘내 마음에 드는 언론에 돈을 준다’는 차원을 넘어 미디어 바우처에 담긴 문제의식을 한 걸음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줄리아 카제 파리정치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쓴 ‘미디어 구하기’(2015)를 펼쳐본다. 카제는 이 책에서 △뉴스의 품질 저하 △발행 부수 감소 △수익성 확보가 되지 않는 신문사 웹사이트를 거론하며 “지금처럼 정보 생산자가 많았던 적은 없었지만 역설적으로 뉴스는 빈곤해졌다”고 진단한 뒤 대안으로 뉴스를 향한 공적 지원 시스템을 제시했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공적 지원의 전제이자 목표, 독보적 저널리즘 구현 

‘뉴스의 빈곤’은 사실 전 세계적 현상이다. 대다수 미디어는 대주주의 사적 이익을 위한 영리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경제적 위기에 처한 대다수 신문사는 뉴스의 품질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비용절감에 나섰다. 카제는 “미국 보스턴글로브는 2002년 미국의 가톨릭 성직자 성추행 사건을 8개월간 취재하며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지출했는데, 여기에는 보도 이후 수만 달러의 소송 비용은 포함하지 않았다”며 “무료뉴스가 실시간으로 재생산되는 사회에서 특종을 터뜨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사라졌다. 오늘날 신문사들이 중시하는 것은 단 하나의 뉴스도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카제는 이 책에서 1945년부터 2012년까지 프랑스 지역일간지 사례를 연구하며 기존 시장에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오면 기존 신문사에 근무하던 기자가 무려 60퍼센트까지 감소하지만 전체 신문기자 수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었다고 전하며 “신문은 많지만 정작 각 신문사에서 생산하는 기사 수는 적어졌고, 기사 길이도 짧아졌고, 다루는 주제의 범위 역시 좁아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더해 “광고 수입은 하루가 지날수록 줄어드는데도 신문사들은 여전히 광고 수입을 추구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민주주의를 빛내기 위해 국민에게 제공되는 뉴스를 온전히 시장 논리에 맡길 수 없다.” 진보적 경제학자의 결론이다. 카제는 “뉴스미디어는 시장 논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가능하다면 지식경제 부문이 오래전부터 누리고 있는 혜택과 유사한 혜택을 미디어 부문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윤만 추구하면 독자적인 양질의 뉴스 제공이라는 (언론사의) 원래 목적을 잊게 된다”고 했다. 무엇부터 바꿔야 할까. 카제는 재단과 주식회사의 중간 형태인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에선 주주에게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고, 주주는 자기가 투자한 자본을 회수할 수 없다. 대신 모든 자연인 또는 법인은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에 기부할 경우 현재 비영리 재단에 기부할 때 적용되는 세재 혜택이 똑같이 적용된다. 언론사는 장기적으로 독립성을 보장받고, 독자와 직원은 기업 경영 참여 기회와 의결권을 갖게 된다. 카제는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에서 대주주는 의결권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수백만 유로의 투자금에 대한 면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의결권의 민주화와 자본의 영속성을 대가로 제공되는 면세 혜택이다. 면세 혜택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입법부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카제는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의 조건으로 “독창적 뉴스 생산”을 강조했다. 사실상 공적 자금이 투여되는 만큼, 가치있고 독보적인 저널리즘을 구현해야 한다. 책의 제목처럼 미디어를 구하려면 보도자료·기자단·출입처 중심의 발표저널리즘에 매몰된 국내 언론 환경이 달라져야 하고, 이를 위해선 시민이 독보적 저널리즘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미디어 바우처 논의의 핵심이다. 미디어 바우처가 자칫 특정 언론사 기자들의 임금 인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최종적 목표는 저널리즘의 질적 향상이다. 이를 위해선 언론사 소유구조부터 기사 생산과정까지 전반의 모델이 달라져야 한다. 미디어 바우처를 시작으로,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