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2019년 근로감독으로 드라마 제작 스태프 노동자성을 확인한 지 2년이 지났지만 현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스태프들은 여전히 도급·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있고 계약 조항 또한 장시간 노동을 방조하는 등 열악한 환경을 유지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는 지적이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이하 스태프지부)는 27일 오전 서울 KBS 본관 앞에서 KBS 드라마 제작현장의 장시간 노동 중단 및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대책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언론개혁시민연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이 공동주최했다. 

스태프지부는 이날 오는 5월 KBS2에서 방영될 ‘오월의 청춘’ 드라마 스태프 도급계약서 및 관련 부속합의서를 예시로 공개했다. 이들은 계약서상 하루 14시간 노동 등 스태프의 장시간 노동이 불가피한데 이동시간이 근무시간 책정에서 제외돼 스태프 과로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27일 오전 서울 KBS 본관 앞에서 KBS 드라마 제작현장의 장시간 노동 중단 및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27일 오전 서울 KBS 본관 앞에서 KBS 드라마 제작현장의 장시간 노동 중단 및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계약서·부속합의서를 보면 스태프 근무시간은 ‘1주 68시간’까지다. 하루 최대 근무시간은 휴게시간 2시간을 합해 16시간으로 정했다. ‘촬영장 집합 시점’부터 ‘촬영이 끝날 때’까지를 근무시간으로 계산하는데, 수도권 밖의 지역에서 촬영할 경우엔 숙소 도착 시간까지 근무시간으로 합했다. 

지역으로 이동하는 날은 근무일로 보지 않는다고 정했다. 또 수도권 밖의 지역 촬영이 잡힌 때 그 전날에 촬영이 없으면 스태프들은 그 전날 미리 도착해 숙박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1주 근무시간이 60시간을 초과하지 않으면 제작사와 스태프는 이동시간을 논하지 않는다”고도 정했다. 

이동시간은 스태프들 장시간 노동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김기영 스태프지부장은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대박부동산’ 경우 밤 12시 용인에서 촬영이 끝나고 다음 날 파주 촬영장까지 아침 8시 30분에 집합하게 했다”며 “촬영 후 장비를 정리하는 시간도,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도, 다음 날 아침 파주로 이동하는 시간도 노동시간으로 적용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계약서 법률 위반을 검토한 윤지영 변호사는 “근무시간을 주 68시간으로 정한 조항은 주 52시간을 초과해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며 “하루 근무시간 14시간 부분도 규정이 불분명해 제작사가 스태프에게 현장에서 14시간 일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역 출장 조항에 “촬영 전날 지방에서 숙박하도록 강제하나, 어떤 보상이나 급여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또 “이동시간을 근무시간에서 배제한 것도 근로기준법을 위반”이라며 “스태프 버스 출발 시각 등을 제작사가 정하고, 제작사가 이동 차량을 제공하며 이런 규칙들은 스태프 통제 편의를 위해 제작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점, 무엇보다 이동시간은 촬영을 가기 위한 필수 활동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동시간은 근무시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시간 촬영 문제는 스태프지부에 꾸준히 제보되고 있다. 스태프지부는 “‘스튜디오드래곤’이 제작한 tvN 방영 드라마 ‘빈센조’도 장시간 지방이동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난 15~23일 9일 동안엔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막판 촬영을 불법적으로 진행했다”고 밝혔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전국영화산업노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5개 단체는 2021년 12월 17일 서울 상암동 JTBC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전국영화산업노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5개 단체는 2021년 12월 17일 서울 상암동 JTBC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2018년 6월12일 지상파-언론노조 산별교섭 상견례 모습. ⓒ언론노조
▲2018년 6월12일 지상파-언론노조 산별교섭 상견례 모습. ⓒ언론노조

 

대안을 논의 중인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4자 협의체’는 2년째 답보상태다. 2019년 언론노조, 지상파 방송사(KBS·MBC·SBS), 드라마제작사협회, 스태프지부 등 4자가 장시간 노동 해결, 휴식권 보장 등의 문제를 논의하고자 모였으나 근로계약 체결 등 근본 쟁점을 둘러싸고 합의를 이루지 못해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특히 SBS는 애초부터 협의체에서 빠졌고, 최근엔 MBC까지 불참 의사를 밝혔다. 

회견에 참석한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환경노동위·비례)은 “방송사들이 불참 의사를 밝히는 등 이런 상황은 더는 용납 못한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대화,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 없이 지속가능할 수 없다”며 “국회 환경노동위원으로 작년부터 꾸준히 ‘무늬만 프리랜서’ 처우개선 및 근로자 지위 인정을 촉구해왔다. 정부가 스태프들의 불법적 노동 실태도 조사하고 관련해 (방송사·제작사에)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4자 협의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은 “노동자·사용자 당사자끼리 협의체를 구성한 첫 단추가 잘못된 것 같다. 노·사·정의 3자에 방송미디어시민단체 등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4자 협의체를 공식 설립해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를 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는 “노동자가 근로계약을 체결하자는게 잘못이냐, 사용자들이 근로계약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잘못이냐. 답은 명확하다”며 “지금 필요한 건 결단이고 그 중심에 KBS가 있다. 공영방송의 가치는 이런 지점에서 드러난다. 올해 임기가 끝나는 양승동 사장이 올해 안에 책임감을 가지고 결자해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방송계가 자기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용우 변호사(민변 노동위 부위원장)는 “방송사는 오늘 회견뿐 아니라 방송 비정규직 의제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데 여타 (다른 산업의) 비정규직 문제엔 정의니, 공정이니 방송으로 떠든다”며 “누가 그 진정성을 믿겠느냐. 스스로의 폐부를 찌르는 심정으로 방송 비정규직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회견 참가자들은 “표준근로계약서 도입과 장시간 노동 근절은 합의가 필요한 게 아니라 법적권리를 이행하는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방송사와 드라마제작사협회는 노동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오늘 회견을 시작으로 지상파 3사와 tvN, JTBC 등 종합편성채널 및 모든 드라마 제작현장의 불법 실태를 조사하고 법적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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