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20일.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가 확인된 날이다. 이날 한겨레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가 대기업 출연금을 받았고, K스포츠 정동춘 이사장이 최순실이 다니는 스포츠마사지센터 원장이라고 보도했다. 최순실이 두 재단 모금에 개입했다는 의혹이었다.

또한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우병우 민정수석과 윤전추 청와대 행정관의 청와대 입성에 최순실 입김이 작용했다고 폭로했다. 박근혜 정부 몰락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다음날 청와대에서 기자들 질문은 최순실로 향했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최순실의 인사 개입 의혹에 대한 입장을 묻자 “일고의 가치도 없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전혀 사실이 아니냐는 확인 질문에 이어 조 의원이 박근혜 정부 비서관 출신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최순실 영향이 전혀 없었냐는 거듭된 질문에도 똑같이 답변했다. 대통령 순방에 재단 인사가 동행했다는 의혹 등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사실을 부인한 사람은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 기자들은 ‘이럴 거면 뭐 하러 브리핑하냐’는 볼멘소리를 냈다. 다만 정연국 이름 석자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기자들은 위안을 얻었다. 청와대 대변인은 민감한 현안 이슈에 대한 답변이나 마이크가 꺼지고 기자들과 만나 답변한 내용을 쓸 때 ‘관계자’라는 표기를 쓰라고 언론에 강요 아닌 강요를 해왔다. 정연국 대변인이 이날에도 관계자 표기를 요청했다면 최순실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지고 난 뒤 청와대의 공식 입장은 관계자 입으로만 처리됐을 것이다.

▲ 2016년 11월20일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춘추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관련 검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기 위해 방송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 2016년 11월20일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춘추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관련 검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기 위해 방송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관계자 표기는 발언 주체 신뢰성을 갉아먹고, 취재 기자의 주관적 작성 위험이 높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 관계자는 좋게 말하면 투명 취재원인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실명을 쓰는 게 바람직하다. 뉴욕타임스는 취재원이 의견을 기사에 반영하고자 할 때 기자는 실명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하고, 에디터는 실명으로 된 정보를 얻도록 기자를 다그쳐야 하며 익명으로 표현할 경우 취재원을 알게 된 경위, 익명 정보 불가피성을 설명하도록 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의 ‘관계자 표기’는 이런 원칙을 들이밀기 부끄러울 정도다. 별다른 이유 없이 관계자 표기를 손쉽게 남발한다. 물론 폭로에 따른 신원 파악 위험성 등 관계자 표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 있지만 브리핑 마이크가 꺼지면 응당 관계자 발언으로 쓰고, 명분이 없는데도 취재원이 관계자 표기를 요청하면 쉽게 수용하는 게 문제다.

지난 21일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이 문 대통령을 만나 전직 대통령 사면 얘기를 꺼냈고, 문 대통령 답변이 나왔다. 언론은 대부분 사면 발언 내용을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전했다’라고 처리했다. 언론에 등장하는 고위 관계자는 이철희 신임 정무수석이다. 이 정무수석이 문 대통령과 신임 시장 만남에 동석했다는 건 청와대 ‘문워크’ 영상에서조차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음에도 고위 관계자로 표기한 것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4월21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과의 오찬 간담회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박형준 부산시장, 문 대통령, 오세훈 서울시장, 이철희 정무수석. 사진=청와대
▲ 문재인 대통령이 4월21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과의 오찬 간담회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박형준 부산시장, 문 대통령, 오세훈 서울시장, 이철희 정무수석. 사진=청와대

관계자 표기 이유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안타까운 보도도 있다. 머니투데이는 “장관도 안 통한 화이자, 홀로 뚫은 이 사람 ‘이재용 없었다면’”에서 지난해 말 백신 확보를 두고 화이자-정부 협상이 난항을 겪었는데 이재용 부회장의 ‘연줄’이 작용해 협상 회의가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 백미는 재계 한 인사 말을 인용해 “한미 백신 스와프를 포함해 최근 백신 확보 현안을 두고 이 부회장의 글로벌 인맥이 조명 받는 데는 이런 뒷얘기가 있다”며 “이 부회장의 부재가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한 것이다. 삼성 측 인사라고 쓰면 뻔히 속 보이는 보도가 될까봐 ‘재계 인사’라고 표기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취재원 보호 같은 거창한 명분은 없다. 관계자 표기에 큰 문제의식이 없거나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하기 위해 ‘관계자’를 남발하는 행태는 한국 언론의 고질적 병폐다. ‘관계자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자 스스로 이런 관행을 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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