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이 운영하는 서울도서관은 지난 5일 ‘2차 가해 우려’를 이유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을 다룬 책 ‘비극의 탄생’ 열람을 제한했다. 열람제한은 열람·대출 등이 불가능한 이용 제한 조치다.

책 저자는 손병관 오마이뉴스 기자다. 그는 피해자 주장을 반박하며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이 부풀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 주장과 배치되는 서울시 직원들 증언이 담겼고 4·7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직전 출간돼 파장이 컸다.

정치·사회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지만 “취재윤리 위반한 2차 가해 집약체”(언론인권센터 성명)라는 비판도 거셌다. 서울도서관의 열람제한 조치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21세기 분서갱유’라는 비판과 서울시 직원인 피해자를 보호하는 결정이라는 목소리가 맞선다. 

서울도서관은 서울도서관 운영에 관한 규정 제7조 등을 근거로 열람 제한 조치를 결정했다. “누구나 도서관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단, 관장은 자료 보존 등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이정수 서울도서관장 결정이다.

▲ 비극의 탄생. 저자 손병관.
▲ 비극의 탄생. 저자 손병관.

2012년 10월 개관 이래 서울도서관은 어떤 책들에 열람제한 조치를 내렸는지 확인했다. 서울도서관이 밝힌 사유와 조치가 유례 없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20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서울도서관이 밝힌 열람제한 도서 목록은 ‘33권’이다.

상권·하권으로 나뉜 책, 1~4권 등으로 나뉜 책을 한 권으로 간주하면 22권으로 집계된다. ‘저자 성추행’과 ‘5·18 역사 왜곡서’ 등 사유가 가장 많다. 22권이라고 해서 작가 22명이 쓴 것은 아니다. 한 명의 작가가 쓴 여러 책이 열람제한 조치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법원에서 아동 성추행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동화작가 한예찬씨 책 11권이 지난 2월16일 열람제한 조치됐다. ‘혜린이 엄마는 초등학교 4학년’, ‘미소녀 고은비’, ‘아도나이 왕국과 아이돌의 꿈’, ‘투명인간 최철민’ 등의 책이 ‘저자 성추행’을 이유로 열람제한 목록에 올랐다.

재판이 선고된 후 해당 출판사는 “오프라인 서점 매대 노출을 하지 않고 반품을 원할 시 모두 반품 받기로 했다”며 한씨 책을 회수한 바 있다.

성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2016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 원심이 확정된 강석진 전 서울대 교수의 책 3권(‘수학의 유혹’, ‘아빠와 함께 수학을’, ‘과학의 본성’)도 저자 성추행 사유로 지난 2월23일 열람이 제한됐다.

역사 왜곡 논란을 부른 책도 ‘5·18 역사 왜곡서’ 사유로 열람이 제한됐다. 지난해 7월21일 열람제한 조치된 저자 김대령의 책 두 권(‘역사로서의 5·18’,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 대상이다. 전두환 회고록도 ‘2017년 법원판매중지 판결’ 사유로 2019년 7월11일 열람이 제한됐다. 그 밖에 지인과의 사적 대화 내용을 동의 없이 인용했다가 논란을 부른 작가 김봉곤의 책 ‘시절과 기분’도 지난 3일 ‘무단 전재·출판사 판매 회수’ 이유로 열람이 제한됐다.

저자의 범죄 혐의가 인정되거나 법원이 판매 중지 결정을 내린 도서, 5·18 역사 왜곡 도서 등에 열람제한 조치를 내린 전례에 비춰보면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비극의 탄생’에 대한 열람제한 조치는 이례적이다. 

▲ 미디어오늘은 2012년 10월 개관 이래 서울도서관이 어떤 책들에 열람제한 조치를 내렸는지 확인했다.
▲ 미디어오늘은 2012년 10월 개관 이래 서울도서관이 어떤 책들에 열람제한 조치를 내렸는지 확인했다.

서울도서관 측은 서울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이같은 조치를 내렸다는 입장. 다만 논란이 커지자 서울도서관은 열람제한 여부를 자료선정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해 논의할 예정이다.

이정수 서울도서관장은 20일 통화에서 “(박원순 전 시장 성추행 사건은) 서울시 내부 상황이고 서울시 공식 입장은 피해 여성이 원활하게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며 “또 언론단체에서 ‘취재윤리를 위반한 2차 가해 집약체’라고 비판하기도 했고, 정파적으로 비화할 소지도 있어서 열람금지(제한)를 시켰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서울시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적용되기도 하고, 도서관법은 국민 알권리와 정보접근을 도서관 사명으로 명시하고 있다. 두 가지 중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 문제”라며 “일단 열람을 금지했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독서·출판 전문가들로 구성하는 자료선정위원회에 상정해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장은 “자료선정위는 분기에 한 번 열린다. 5월이나 6월 초쯤 개최될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책에 대한 판단은 독자가 한다고 믿는다. 다만 이번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판단한다. 시민들이 ‘검열이다’, ‘분서갱유다’ 오해하시는데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손 기자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상당수 기자들이 지탄해 마지않은 ‘반일종족주의’도 ‘표현의 자유’ 아래에서 당당히 대출되는 세상에, 지난해 가장 뜨거웠던 박원순 사건의 팩트를 다투는 책에 대해 시민의 접근을 막을 근거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썼다. 손 기자는 20일 통화에서 서울도서관 조치에 “이번 행정 처분이 옳은 것인지 판단을 구할 것”이라며 대응을 시사했다.

한편 오세훈 서울시장은 20일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에게 “지난 1년여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낸 피해자와 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힌 뒤 “성희롱·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해 2차 피해가 가해질 경우 한 치의 관용조차 없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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