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61주년이다. ‘4·19의 시인’으로 불리는 김수영(1921~1968) 탄생 100년 된 해이기도 하다. ‘4·19의 시인’은 김수영을 수식하는 표현 중 하나이기에 김수영의 관점으로 4·19를 다시 볼 필요도 있다. 4·19로 대통령을 끌어내렸던 비슷한 경험이 4년 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4·19 전후로 그가 쓴 시를 보면 지금의 현실이 함께 보인다. 김수영의 시는 오래돼 낡은 게 아니라 오래 잊었던 것이라 새롭다. 

독립운동가라던 이승만의 친일옹호와 미온적 개혁, 장기집권의 불만은 3월15일 부정선거로 폭발했다. 이날 마산에선 시민들이 항의했고 이날 사라진 김주열 학생의 행방불명 소식도 알려졌다. 북한 김일성만 적으로 규정한 채 사회 내부엔 적폐가 쌓여갔다는 걸 김수영은 간파했을까. 북한vs남한, 공산주의vs자본주의, 여당vs야당, 전선은 이렇게 명확하지 않았다. 적은 바로 옆에도 있었다. 스산한 기운이 지배하던 4월초 김수영은 시를 하나 지었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하…… 그림자가 없다, 60년 4월3일) 

4월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 떠올랐다. 김주열에게 최루탄을 쏜 이는 일본 헌병대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박종표였다. 반민특위에 붙잡혔다가 풀려나 마산경찰서에서 ‘애국경찰’로 일하던 중이었다. 마산의 시위는 전국으로 퍼졌다. 

피의 화요일, 4월19일 전 국민의 시위로 1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이승만은 요지부동이었다. 국무위원들과 이기붕 부통령이 차례로 사퇴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25일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서 이승만에게 물러나라고 했다. 26일 오전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린 시민들이 경무대로 향하자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했다. 이날도 김수영은 시를 썼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60년 4월26일)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부패를 밀어냈다. 부정을 용인했던 구조를 바꾸고 과거와 결별해야 한다고 했다. 걸어뒀던 사진이 누구든, 그 사진을 버려야 했다. 몇몇 위정자를 몰아내는 것, 섬기던 주인을 바꾸는 수준은 혁명일 수 없어서다. 그러나 여지껏 이승만을 말하는 자들이 있고 한쪽엔 사진을 떼어낸 그 자리에 다른 주인님의 사진을 걸어둔 무리가 있다. 

▲ 2010년 7월1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후 고개숙여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10년 7월1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후 고개숙여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 하야 이후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있는 사회”(기도, 1960년 5월18일)가 이어졌다. 권력의 공백을 시민의 힘으로 채우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육법전서와 혁명, 60년 5월25일)라고 했다.

‘육법전서와 혁명’에서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며 한탄했고, “손때 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중략) 4·26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해방했지만 독립하지 못한 건 대한민국뿐이 아니었다. 구성원들도 스스로 서지 못한 채, 적을 만들어 비난하며 뭉쳤다. 적대적 기생관계로 버티는 구조를 유지하는 한 혁명은 없다. 

4·19로 이승만 자유당 정부가 막을 내리고 그 자리에 민주당이 앉았다.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김수영은 예리하게 지적했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그 방을 생각하며, 60년 10월30일) 물론 4·19는 유의미한 역사이자 진보다. 그래서 김수영은 이 시 끝에서 희망을 말했지만 4·19가 기존 육법전서를 바꾸지 못했다는 걸 지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때묻은 혁명”이었고, “현 정부가 그만큼 악독하고 반동적이고 가면을 쓰고 있”(중용에 대하여, 60년 9월9일)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당시 정부의 한계를 비판한 작품도 있다. “루소의 ‘민약론(사회계약론)’을 다 정독하여도/ 집권당에 아부하지 말라는 말은 없는데/ 민주당이 제일인 세상에서는/ 민주당에 붙고”,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만 아니면 사람 따위는 기천 명쯤 죽여 보아도 까딱도 없거든”(만시지탄은 있지만, 60년 7월3일)  

김수영이 꿈꿨던 세상은 독립한 개인, 강한 시민이 모인 공동체였다. 어떤 우월한 이념이나 지도자가 있어 그걸 중심으로 사람들이 의존하는 모습을 꿈꾸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다 나와 1953년 쓴 시 ‘달나라의 장난’을 보면 그의 가치관이 잘 드러난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여기서 ‘공통된 그 무엇’이란 이데올로기나 유명정치인이라고 봐도 괜찮다. 반공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혹은 이승만, 장면, 김구. 독립하지 못한 나라는 이념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루는 김수영이 동료시인 신동엽에게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형, 문학하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무슨무슨 주의의 노예가 될 순 없는 게 아니겠소”  

김수영을 말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자유다. 김수영의 자유는 최근 쓰이는 ‘자본의 자유’의 뜻이 아니다. 김수영은 자유를 ‘사랑이 없는 방종’과 구분했고 ‘스스로 도는 팽이’처럼 고독을 포함했다. 

▲ 김수영 문학관에 게시한 시 ‘푸른하늘을’. 사진=장슬기 기자
▲ 김수영 문학관에 게시한 시 ‘푸른하늘을’. 사진=장슬기 기자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하늘을, 60년 6월15일)

하늘을 나는 새는 자유롭다. 구속이 없는 상태만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춥고 거센 바람을 홀로 견뎌야 하는 고통을 봐야 한다. 책임이 없는 안일함이 아니라 자유 즉 혁명은 더 불편한 작업,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1년여의 권력공백을 군인들이 차지했다. 다시 시를 썼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 61년) 김수영은 아팠나 보다. 절망했지만 희망도 말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아픈 몸이, 61년)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며 냉정해졌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했었다”(전향기, 62년 5월)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쓰자면서도 새 주인 사진을 걸었던 모습이 사실 모두에게 있었을지 모른다. 

독재도 일상이 되고, 저항도 과거가 됐다. 이제 사람들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65년 11월4일)하면서 살았다. 이런 비겁한 모습을 진솔하게 표현한 이유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한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또 대선에 출마한 1967년, 김수영은 시에서 아들을 불렀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거다”(사랑의 변주곡, 1967년 2월15일) 선거 3개월전 김수영은 독재자의 재선을 예측하며 미래세대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 시인 김수영. 사진=김수영문학관
▲ 시인 김수영. 사진=김수영문학관

김수영은 1968년 6월15일 버스에 치었고 그 다음날 숨을 거뒀다. 그래서인지 68년 시는 그의 사상을 온전히 담은 듯 더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특히 마지막 두 편의 시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와 ‘풀’이 그렇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 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 스탠드가 울린다”(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68년 4월23일) 

언론의 자유를 논할 때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김일성만세”, 60년 10월6일) 것이라고 말했고,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없다)”(산문 ‘창작 자유의 조건’, 62년)고 엄밀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에게 1968년 현실은 걸리적거리는 게 너무 많아 짜증스러운 시대이지 않았을까. 문학의 언어로 그의 죽음을 비유하면 그는 의자가 많은 세상에 결국 걸려 넘어졌다. 

68년 5월29일 탈고한 ‘풀’은 그의 유언이 됐다. ‘풀’은 논어 ‘안연편’에 대한 김수영의 리뷰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라는 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도한 이들을 죽이고 유도한 사람을 잘 살게 하면 됩니까” 공자가 답했다. “정치를 한다며 어떻게 사람이 죽이겠느냐, 군자(통치자)가 선함을 행하면 소인(백성)은 선해질 것이다. 군자의 덕성이 바람이라면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 풀 위로 바람이 스치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

이는 공자의 덕치주의를 잘 나타낸 이야기다. 정치인이 행하는 대로 백성이 따라온다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정치관이다. 김수영은 ‘풀’ 1연에서 이를 소개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김수영의 이야기는 2연과 3연에 나온다. 논어에 대한 비판이다. 백성(풀)이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민심이 주체라는 메시지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자신들이 주인인냥 떠드는 위선의 위정자들(바람)이 여전하다. 막말과 혐오는 넘치지만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폭포, 56년 2월)지는 ‘폭포’와 같은 “곧은 소리”는 부족하다. “혁명은 못하고 방만 바꾼 것” 아니냐는 질문이 이 시점에도 유효한 걸 보면 김수영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 김수영문학관에 게재된 김수영의 마지막 시 ‘풀’. 사진=장슬기 기자
▲ 김수영문학관에 게재된 김수영의 마지막 시 ‘풀’. 사진=장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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