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를 최소화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화할 것인가” 프랭크 푸레디는 저서 ‘공포 정치’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두 가지 선택지에서, 정치인들은 공포와 정치를 한 세트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예로부터 공포는 인류의 생존 확률을 높여왔던 정서였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고, 또 ‘파충류의 뇌’라고 불릴 정도로 원초적 감정인 만큼 공포는 매력적인 정치 자원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함이요’란 메시지는 그 어느 말보다 강력하고 단순하다. 정치인들은 이 정치적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때때로 일부러 불안을 조장하기도 한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백신 정치화’는 공포 정치의 일종이다. 아스트라제네카 안정성을 피력하기는커녕 정치권은 “대통령이 백신 1호 접종자가 돼야 한다”며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재료로 ‘백신 공포’를 동원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23일 오전 서울 종로구보건소에서 아스트라제네카(AZ)사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있다. 사진=청와대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23일 오전 서울 종로구보건소에서 아스트라제네카(AZ)사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있다. 사진=청와대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에 나서자 이번에는 극우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한 주사기 바꿔치기 논란이 등장했다. 문 대통령의 접종 녹화 영상을 보면 간호사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통에서 백신을 추출한 뒤 가림막 뒤로 갔다가 나오는데, 이때 간호사가 주사기를 바꿔치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방역 당국과 접종을 시행한 종로구청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란 입장을 내놨지만 백신 접종을 시행한 간호사가 ‘죽여버리겠다’ 등 협박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국민 불안을 잠재우고 방역에 힘을 더해야 할 정치권이, 정치 공방에 몰두하다 혼란만 가중한 꼴이었다.

백신을 정치화한 정치권도 문제지만 이를 부채질한 언론도 문제가 있다. 애초 유승민 전 미래통합당 의원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제기한 ‘1호 접종자’ 논란도 언론이 퍼뜨리지 않았다면 커지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언론은 ‘문 대통령이 1호 접종자가 돼야 한다’는 야당 주장에, ‘국가 원수가 실험 대상인가’란 여당의 반박을 중계하면서 싸움을 부추겼다.

이 와중에 백신 공포를 자극하는 기사도 끊이지 않았다. ‘코로나보다 무서운 백신 부작용’ 등 불안을 자극하는 제목을 내거는가 하면 ‘AZ백신 공포, 글로벌 확산’과 같이 사실을 과장하는 보도도 이어졌다. 코로나19 백신과 관련한 시민 궁금증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보도도 꽤 있었지만 이들 보도는 불안을 조장하는 대다수 보도에 묻혔다.

공포를 자극하는 보도는 잘 팔린다. 언론은 백신 공포가 주는 콩고물을 넙죽 잘 받아먹고 있었다. 정치권과 언론이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에 기생하는 사이, 백신을 맞고 싶지 않다는 국민은 늘었다.

특히 정치적 성향에 따라 백신 접종 의사가 갈렸다. KDI 조사결과 여당 지지자는 82% 이상이 접종을 희망했지만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지지자들은 68%가 접종하겠다고 답했다. 과학 영역이 언제부터 정치 성향에 따라 판단할 요소가 됐는지 모르겠다. 공포심을 정쟁 도구로 활용한 정치권과 이를 국민에게 그대로 전달한 언론이 만든 결과다.

공포의 대상은 의외로 그리 무섭지 않다. 아스트라제네카의 접종 사망률은 벼락에 맞을 확률의 3분의 1보다 작다. 이 명백한 사실을 가리는 건 불필요한 공포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아니다.

1933년 취임연설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 정치와 언론은 진정 맞서야 할 상대를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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