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대왕의꿈’ ‘천추태후’ ‘정도전’.
 
이 네 사극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연개소문’과 ‘대왕의꿈’은 삼국시대를, ‘천추태후’와 ‘정도전’은 고려 전기와 후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인데요. 이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궁궐이 같은 세트장을 썼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세트장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007년 충북 단양군에 지은 SBS ‘연개소문’ 세트장 가운데 수·당나라 궁궐 정전입니다. 고구려와 대립한 수·당나라의 내부 정치 갈등까지 담았던 ‘연개소문’에서 중국 궁궐 세트장을 별도로 제작했던 것이죠. 

▲ BS 드라마 '연개소문' 당시 수나라와 당나라의 궁궐 촬영을 위해 제작한 온달 세트장이 사극 속에서 우리 궁궐로 둔갑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드라마 연개소문(당나라), 드라마 천추태후(고려), 영화 쌍화점(고려), 드라마 대왕의꿈(신라)
▲ SBS 드라마 '연개소문' 당시 수나라와 당나라의 궁궐 촬영을 위해 제작한 온달 세트장이 사극 속에서 우리 궁궐로 둔갑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드라마 연개소문(당나라), 영화 쌍화점(고려), 드라마 대왕의꿈(신라), 드라마 천추태후(고려)의 장면.

그런데 이후 이 세트장을 다른 사극들이 엉뚱하게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공영방송 KBS가 ‘공적 역할’로 강조하는 대하 사극에서 특히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KBS ‘대왕의꿈’에서는 신라 궁궐로, ‘광개토태왕’에서는 고구려 궁궐로, ‘천추태후’와 ‘정도전’에서는 고려 궁궐로 썼습니다. MBC의 경우 신라가 배경인 ‘선덕여왕’ 세트장을 ‘무신’에서는 고려 궁궐로, ‘기황후’에서는 원나라 궁궐로 쓰기도 했습니다. 나라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궁궐을 국적 구분 없이 마구 써온 것이죠.

SBS ‘조선구마사’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중국풍의 복식과 음식, 실내 세트장이 나온 대목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과도한 각색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논란이 되자 광고주들이 광고를 철회했고, 결국 종영됐습니다. “최근 이슈가 됐던 중국 협찬이나 제작 지원 사례와 달리 100% 국내 자본으로 제작됐다”는 해명에도 중국과의 연관성을 찾아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부 언론은 중국과 연결고리를 찾으며 논란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허프포스트코리아는 “‘조선구마사’ 박계옥 작가가 집필 계약을 맺은 콘텐츠 회사는 중국 정부 영향력 아래에 있다” 기사를 내면서 이번 논란과 연결지었는데요. 잘 들여다보면 ‘조선구마사’에 중국 정부나 자본이 개입했다는 근거로 쓰이기에는 직접적인 정황이 제시되진 않습니다.

▲ 조선구마사 '포스터'.
▲ 조선구마사 '포스터'.

‘조선구마사’를 옹호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이번 논란을 중국과 한국의 갈등 구도에서만 접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사가 의도적으로 동북공정에 힘을 보탰다는 직접적인 정황은 없는 상황입니다. 반면 한국 사극에서 전반적으로 이 같은 고증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부실고증 문제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궁궐에 대해 지적했지만 다른 문제도 많습니다. 특히 복식의 경우는 황당한 사례가 많은데요. 픽션 요소가 강력했던 사극인 MBC ‘기황후’의 몽골 장군들은 MBC ‘주몽’과 ‘선덕여왕’에 등장했던 부여, 고구려, 신라의 갑옷을 그대로 입고 등장합니다. KBS ‘대조영’에 등장하는 당나라 관료 갑옷이 실은 ‘해신’에서 장보고가 입었던 갑옷이기도 했고요.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중국식 디자인이 가미된 갑옷을 입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내용은 어떤가요. KBS ‘대하사극’의 대표작인 ‘태조왕건’의 왕건, 신숭겸, 박술희는 중국 삼국지연의의 유비, 관우, 장비의 캐릭터를 연상케 합니다. 나주 공략 때 왕건의 책사 태평이 남동풍을 일으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은 삼국지연의 적벽대전의 요소를 지나치게 따라한 것이라 당시에도 논란이 됐습니다. 

굳이 중국과 연관되지 않더라도 허술한 고증 문제는 비일비재합니다. 삼국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 시대가 다름에도 전방위적으로 같은 소품을 쓰거나 시대에 맞지 않은 복식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KBS ‘불멸의 이순신’에 나온 비늘 형태로 된 이순신 장군의 갑옷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갑옷입니다. 사극 제작자들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멋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합니다.

▲ 위쪽 사진은 왼쪽부터 몽골(기황후)과 신라(선덕여왕) 등장 인물의 갑옷. 아래 사진은  신라(해신)와 당나라(대조영) 등장인물의 갑옷.
▲ 위쪽 사진은 왼쪽부터 몽골(기황후)과 신라(선덕여왕) 등장 인물의 갑옷. 아래 사진은 신라(해신)와 당나라(대조영) 등장인물의 갑옷.

조재휘 영화평론가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명량’(2014)의 조선군 고증 문제를 비판할 때 ‘고증 같은 거 왜 따지냐? 재밌음 그만이지’하던 분들의 무신경함이 다년간 쌓여서 결국 ‘조선구마사’로 이어진 겁니다. ‘용의 눈물’ 이후 꾸준히 후퇴해오던 한국사극의 고증에 대한 경시와 천대, 대중의 암묵적 묵인이 이 참사를 빚어낸 거지요. ‘대중이 뭘 알겠나? 이 정도는 허용되겠지?’한 겁니다. 결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퓨전사극’ ‘판타지 사극’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때때로 이런 ‘타이틀’이 제대로 고증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봉쇄하는 ‘치트키’처럼 쓰였습니다.  

물론, ‘상상력’을 가미하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아닙니다. 사실 역사를 그대로 구현하는 사극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료에 한계가 있고, 제작자의 ‘관점’이 담기기에 정통이든 판타지든 모든 사극은 어느 정도의 ‘왜곡’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고, 개연성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같은 판타지 사극이라도 기초적인 고증을 갖춘 상태에서 상상력을 더하는 것과 아무 맥락 없이 갖다 쓰는 건 다릅니다. ‘조선구마사’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사극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이는 ‘동북공정’의 문제라기보다는 ‘퀄리티’와 ‘리얼리티’의 문제이지 않을까요? 이번 논란이 ‘중국풍’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극의 총체적인 고증 부실 문제로 접근하고, 콘텐츠 제작자들이 이 대목에서 더욱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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