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인권선언 50돌을 맞는 우리의 풍경은 참으로 쓸쓸하다.
반인권의 상징으로 국내외에서 철폐요구가 끊이지 않았던 국가보안법이 국제인권선언과 함께 제정 50주년을 맞은 ‘아이러니’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인권’이 때론 무지막지한 형태로, 때론 조용한 음지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우리의 치욕적인 인권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국제인권선언 50돌을 맞는 우리의 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언론의 ‘인권불감증’이다. 국제인권선언 50돌을 축하하는 팡파레가 울릴 즈음 터져나온 김훈중위 사망의혹사건은 우리 언론의 ‘인권불감증’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시사저널의 ‘특종’으로 귀착됐지만, 이 특종이 나오기까지는 우리 언론의 ‘인권불감증’과 기자들의 ‘직무유기’가 단단히 한몫했다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밝혀진 바이다.

대부분의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김중위 사망의혹사건을 이미 지난 봄에 인지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취재하지 않았고, 일부 신문에서는 기사가 출고까지 됐으나 결국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는 소식이 시사저널의 특종과 함께 전해오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군내 의문사 사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민단체들의 집계에 따르면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건이 30여건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이에 대해 심층취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김중위 사망의혹사건은 그 어느 의문사보다도 많은 정황들을 내포한 것이었음에도 보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우리 언론이 ‘인권’에 대해 최소한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언론은 김중위 사망의혹사건에 대한 ‘뒷북치기’ 보도에서도 ‘주의 성실’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비록 직설화법을 피하기는 했지만 김영훈 중사를 김중위의 살해범으로 예단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언론의 ‘추측보도’대로 김중사가 살해범으로 밝혀질 공산이 적지 않다는 점을 전면적으로는 부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의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되는게 언론의 책무이다. 행여 김중사가 살해범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뒤의 일이다.

최종 선고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무죄로 간주한다는 법률적 상식에 입각한다면, 더구나 사건의 파장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진 대형사건이라면 그 대상이 누구이던 개인의 인권은 보호받아 마땅하다. 혹시라도 김중사가 살해범이 아니라고 최종 판단이 내려진다면 언론의 예단의 칼날에 입은 상처는 한줄의 정정보도로 상쇄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언론의 ‘인권불감증’, 아니 더 나아가 ‘인권 침해보도’는 한두 군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각종 사건사고 보도에서 가해자나 피해자의 신원을 거리낌없이 없이 노출시키는 행태, 재연극이다 시민 표정이다 뭐다 하면서 개개인의 초상권과 사생활을 침해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나타나고 있다.

인권은 큰 데서만 성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양심수, 의문사와 같이 극단적 형태의 인권문제도 있겠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른바 ‘온정 보도’라는 미명하에 아버지에 의해 손가락이 절단된 한 꼬마의 신원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도 전자와 비중을 가늠하기 어려운 인권침해임에 분명하다.

언론은 국제인권선언 50돌을 기념하는 보도를 그 어느때보다도 충실하게 내보냈다.
하지만 국민이 진정 원하는 것은 이런 일회성 보도가 아니다. 거리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인권 침해의 현장을 찾아내 폭로함으로써 ‘인권지킴이’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혹자는 보도의 가치비중을 따지면서 정치 경제를 강조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정치 경제는 인간 생존의 ‘조건’에 불과하지만 인권은 인간 생존의 이유이며 근거인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