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아직 꺼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다시 3월이 찾아오고, 서서히 겨울에서 봄을 향해 절기가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3월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안타까운 소식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뀐다고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있음을 고민케 한다.

그 소식은 바로 작년 2월, 자신이 MtF(Male to Female, 생물학적 성은 남성이나 본인이 인식하는 성정체성은 여성임을 뜻하는 표현) 트랜스젠더임을 고백하고 상부 허락을 받아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돌아온 고(故) 변희수 하사 사망 소식이었다.

처음 싸움이 시작될 무렵인 작년 3월20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나누면서 고인이 밝혔던 내용대로 (한겨레 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기갑의 돌파력으로 그런 차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하하”) 변희수 하사는 강제로 군대에서 배제되기 전까지는 한국 사회 주류가 여러모로 좋아할 만한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스스로 적극적으로 애국주의적이며 군인이 되길 원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의당 대표실 앞에 변 전 하사의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의당 대표실 앞에 변 전 하사의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큰 충격 준 변희수 하사의 사망

심지어는 고등학교도 부사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스스로 진학할 정도였다. 군 복무 중에도 지속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만약에 그가 소위 ‘헤테로’(hetero, 이성애자)적인 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또는 성소수자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대다수 한국 성소수자들이 그렇듯 자기 정체성을 군에서 근무하는 기간 내내 비밀로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언젠가는 높은 직위에도 오르는 것은 물론, 보수 언론들에서도 ‘참군인의 표상’으로 칭송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부터 인식하고 있던 자신의 성 정체성을 긴 고민 끝에 스스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는, 그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한국 군대는 무척이나 애국적인 그를 ‘성전환’을 했다는 이유로 곧바로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 배제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한국 군대와 여전히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회가 합작한 ‘사회적 타살’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은 이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계속 싸움을 다짐해왔던 모습을 보였기에 변희수 하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던 것이 컸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닐 수가 있다. 아무리 몇몇 언론이나 보도를 통해서 그가 부당하게 군대에서 강제 전역을 당한 것을 알리고, 전달하더라도 결국 한국 사회 전반이 성소수자를 대하는 폭력적 자세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개인이더라도 의지를 잃고 지치는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미디어’ 전반이 성소수자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마냥 완전하지는 않아도 한국 사회가 어떻게 성소수자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지를 다루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분명 조금씩 개선되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한국 사회 내부의 성소수자 인권. 한국 미디어는 그간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뤄왔을까.

‘여장 코미디’와 ‘동성연애’에서 시작된 미디어의 시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 매체가 제작되기 시작한 1960년대로 돌아가 보자. 6·25 여파가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당시 막 TV가 확산되기 시작하던 해외에 비하면 여전히 한국에서는 TV보다 영화나 연극 등의 공연이 인기를 모으던 시점이다. 다시 말하면, 1960년대 당시 한국 영화는 2020년 현재 한국 영화 그 이상으로 한국 사회 최전선을 달리던 엔터테인먼트 매체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시기, 한국 영화에서는 서영춘이나 구봉서와 같은 당대 인기 코미디언을 중심으로 ‘여장 남자’ 코미디가 한창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좀더 이전에는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파격적이었던 ‘자유부인’(1956) 등의 성공으로 점차 초기적이면서도 조금 뒤틀린 형태로 ‘여성상위시대’ 개념이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는 코미디 영화계에서 ‘남자 식모’(1968)나 ‘남자 미용사’(1968) 같이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만이 하던 직업을 남자가 한다’는 것을 포인트로 잡은 작품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 ‘여자가 더 좋아’(1965)나 ‘남자와 기생’(1969) 같이 본격적으로 ‘여장하고 여자 행세를 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서영춘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여자가 더 좋아’는 남자임에도 성격과 행동이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여성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진지하게 의사로부터 성전환 수술 권고’까지 받는 설정까지 받는 등의 모습도 등장하기도 했었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들 작품이 진지하게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 자신과 다른 생물학적 성이 사회문화적으로 주로 입는 옷을 입는 행위 또는 움직임)을 탐구하려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잘 나가던 인기 남자 코미디언이 여성 옷을 입고, 여성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생기는, 상식을 뒤집는 움직임이 낳는 웃음에 좀더 초점을 맞춘 것이 컸으리라.

▲ 사진=Pixabay
▲ 사진=Pixabay

또는 이미 헐리우드는 물론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던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서 이미 ‘여장 남자’ 설정을 통해 웃음을 낳았던 것에 모티브를 잡았던 것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단, ‘뜨거운 것이 좋아’의 경우 간접적 대사나 설정 등을 통해 은연 중 성적 정체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남긴 것이 추후 평단이나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의 인정을 받았다.)

‘여장 남자’라는 소재가 이렇게 큰 고민 없이 쉽게 코미디로 쓰일 무렵, 레즈비언이나 게이와 같은 성적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할 문제나 ‘문란한’ 성 문화의 상징, 또는 신문 구석 기사에 ‘가십거리’로 회자되는 일이 계속 됐다.

당초 게이나 레즈비언이나 ‘동성애’라는 표현보다는, 비하적 의미를 담은 ‘동성연애’라는 표현이 더욱 사회적으로 널리 쓰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68혁명을 앞두고 점차 개인의 성적 정체성과 자유에 대한 인식이 퍼져가던 해외에서는 조금씩 사적인, 또는 오랜 시간 터부로 숨겨두고 있던 소수적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움직임이 영화나 소설을 통해 전개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몇몇 작품은 한국에도 들어오기도 하였으나 여러모로 ‘해외의 진기한 움직임’ 이상을 넘기는 어려웠다. 일찌감치 ‘자유부인’으로 센세이션을 만든 감독 한형모가 1960년에는 한국 영화 최초로 동성애를 다루는 것은 물론, 최초로 레즈비언을 소재로 삼은 영화 ‘질투’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지극히 동성애 문제를 ‘정신병’으로 해석하는 당대의 차별적 주류 시선을 넘지 못해 왔다.

이러한 상황은 1970~1980년대가 돼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해외의 경우 68운동이 낳은 여러 사회적 전복과 움직임 등이 사회 전반에 레즈비언이나 게이, 트랜스젠더나 바이섹슈얼을 비롯한 여러 성소수자의 존재를 점차 전면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은 10월 유신과 10·26, 그리고 12·12와 5·18로 상징되는 군사 독재가 지속됐던 시기이다.

일찌감치 해외에서 유학을 하거나, 또는 해외를 통해 들여온 매체를 통해 점차 지식인 사회 내부에 섹슈얼리티와 성 정체성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늘어났지만, 그것이 곧바로 한국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로 이어지기에는 어려웠다.

이러한 한계에도 1960년대보다는 좀더 직접적으로 성소수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늘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활동을 얼마 하지 못하고 요절했지만, 미국 UCLA에서 영화를 배운 뒤 귀국해 ‘고래사냥’이나 ‘영자의 전성시대’ 등 작품으로 일세를 풍미한 하길종의 데뷔작 ‘화분’(1972)는 이효석의 동명 원작을 베이스로 동성애와 양성애를 아우르는 섹슈얼리티를 사이키델릭한 시선으로 다루는, 무척이나 기묘한 작품이었다.

비록 이 작품은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의 ‘테오레마’(1968)를 표절한 것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됐지만 (김효정, 오마이뉴스, ‘불멸의 살리에르’ 영화감독 하길종, 그는 왜 ‘표절’했나) 한국 영화사나 미디어사에 있어 성소수자가 직면하는 섹슈얼리티를 정면으로 꺼낸 의의는 쉽게 무시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미로 ‘화분’은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김수형 연출의 ‘금욕’(1976)을 비롯해 한국 영화에서 한동안 동성애를 소재로 한 파국적 사랑을 다룬 영화가 등장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계가 없던 것은 아니다. ‘화분’이나 ‘금욕’을 비롯해 당대 나왔던 작품들은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루는 의의는 있어도, 결국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성소수자들은 여러모로 신경증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모습들로 점철되는 동시에 결말은 어떤 식으로든 파국적으로 끝나는 일이 잦았다. ‘동성애’의 길을 선택한 이상 영화 속에서라도 이를 택하는 이들은 일단 격정적이고 온 사회를 뒤흔드는 길을 가는 운명 정도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디어 전면에 등장하는 성소수자들, 그러나…

이렇게 1960년대와 1970년대 각각 싹을 틔웠던 미디어 속 성소수자 존재는 한동안 비슷한 구도로 이어졌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단순한 코미디 소재로 성소수자가 ‘활용’되거나, 조금은 자극적이면서도 색다르고, 끝내 파멸로 치닫는 강렬한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성소수자가 활용되는 식이었다. 물론 여전히 방송이나 신문에서 ‘동성연애’라는 명칭으로 이들 성정체성이 모멸적으로 호칭되며 가십거리로 쓰이는 양상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러던 상황에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던 것은 형식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다시 검열의 단계적 철폐를 비롯해 작품의 독립적 창작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1990년대부터이다. 물론 여전히 이전의 유형에 해당하는 작품이 안 나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송희일이나 김조광수를 비롯해-본격적인 커밍아웃 자체는 2000년대에 진행했지만-자신을 성소수자로 인식하며 작품을 만드는 독립영화 감독이나 제작자가 등장했던 시기가 바로 1990년대였다.

신촌 롤링스톤즈 락카페 화재 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요절한 젊은 감독 이훈이 하리수보다 먼저 트렌스젠더임을 밝히고 배우로 활동했던 ‘하지나’를 캐스팅한 B급 스타일의 퀴어 영화 ‘마스카라’(1995)가 나오는 것은 물론-비록 당시에는 ‘게이’라고 잘못 호명되었지만-실제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활동하던 이들을 대거 출연시키며 트렌스젠더 삶을 소재로 만든 뮤지컬 ‘미스터 레이디’가 나오기도 했다.

▲ 2006년 11월 개봉한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 사진=다음 영화
▲ 2006년 11월 개봉한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 사진=다음 영화

심지어는 개봉 당시에는 ‘마스카라’보다 더욱 수면 아래로 묻혔지만, 중년 게이 일탈과 연애를 그린 박재호 연출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과 같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2000년대가 되면 1990년대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성소수자 정체성을 소재로 한 캐릭터나 미디어 매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많은 주목을 받은 가수이자 배우, 모델로 활동한 트렌스젠더 연예인 ‘하리수’가 이전의 ‘하지나’보다도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으며,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KBS ‘개그콘서트’에서 코미디언 황승환이 트렌스젠더 클럽의 마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측되는 ‘황마담’ 캐릭터를 비롯해 단순한 남장여자가 아니라 트렌스젠더를 소재로 삼은 캐릭터를 선보이며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여기에 1990년대 중반부터 알게 모르게 한국에 유입되고 정식 수입되기 시작한 일본 BL(Boys Love) 만화의 등장과 유행은 BL과 유사한 정서를 조금씩 용인하는 정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준익의 ‘왕의 남자’(2005)나 유하의 ‘쌍화점’(2008)과 같이 남성 배우들 사이 동성애를 작품의 중심적 소재로 내세우는 작품이 관심을 이끌었던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동시에 앞서 언급했던 감독 이송희일과 영화 제작자 김조광수가 독립영화 ‘후회하지 않아’(2006) 개봉에 발맞춰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커밍아웃을 감행했다. ‘줄탁동시’ 등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은 김경묵, 이송희일 영화의 연출부에서 활동하면서 ‘올드 랭 사인’이나 ‘알이씨’ 등의 작품으로 조금씩 자기 모습을 드러낸 소준문이 활동을 시작한 시점, ‘3xFTM’과 ‘종로의 기적’을 비롯한 퀴어 주제의 다큐멘터리에 이후에는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제작한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가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도 이때다.

심지어는 좀더 대중적 드라마인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은 주인공 남성이 ‘여장남자’에게 동성애 감정을 가지고 사랑을 고백한다는 설정으로 인기를 모았다. 분명 이전 작품들보단 진일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나온다고 해 한국 사회 내 성소수자 인식이 갑작스럽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 이전보다는 성소수자 캐릭터를 매체에 등장시키는 비율도 상승했고, 성소수자를 그저 금기로만 보는 시선에서 탈피했다. 하리수를 비롯해 무척이나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홍석천이 자신이 게이임을 드러내며 대중적인 성소수자 연예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독립영화 영역에서는 2000년부터 퀴어문화축제와 연계한 형태로 ‘퀴어영화제’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성소수자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나 스스로 성소수자임을 드러낸 영화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분명 양적으로, 질적으로 변화는 있었다.

허나 여전히 실제 일상에서, 삶 속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독립적인 창작 영역을 넘어 대중적 미디어 영역에서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인식이 변화를 맞이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분명 하리수는 오랜 시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라는 식의 혐오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황마담 캐릭터도 진지하게 트렌스젠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같은 시도는 분명 독특했으나 결국 작품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바로 ‘이성애’로 전환하는 매우 ‘안전한’ 로맨스가 됐다. 게이를 다룬 영화 ‘왕의 남자’나 ‘쌍화점’을 비롯해 레즈비언을 부분적으로 다룬 영화였던 변혁 연출의 ‘주홍글씨’(2004)는 여전히 ‘파국에 흐르는 로맨스’라는 클리셰적 흐름을 넘지 못했다.

이전에는 순정만화 영역에서 큰 구분이 없이 소화되던 BL, 그리고 BL보단 아직 세가 약해도 GL(Girls Love)가 서서히 자신만의 영역을 이루고 등장했지만 이조차도 한정적 흐름에 가까웠다.

2020년대, 변화를 위한 움직임은 가능한가

2010년대에도 한동안 20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흐름이 이어졌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Abracadabra’(2009)나 케이윌의 ‘이러지마 제발’(2012)과 같은 대중음악 뮤직비디오에서도 더욱 격정적으로 동성애를 소재로 사용하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으며, tvN에서 2012년 방송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는 더욱 직접적으로 게이나 바이섹슈얼의 성정체성을 가진 청소년 캐릭터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전보다 더 일본의 BL이나 GL을 수입하는 것을 넘어 유료 웹툰 플랫폼인 ‘레진코믹스’나 ‘봄툰’ 등 등장과 맞물려 웹툰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BL이나 GL을 시도하는 양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성소수자 이야기가 대중 매체에서 ‘아웃사이더’라고 말하기엔 어려운 환경이 된 지 오래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 주류나 전반이 성소수자에 대해 완전히 마음의 장벽을 부쉈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웠다. 오히려 더욱 세부화하고, 첨예화한 형태로 성소수자를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최초의 MtF 트렌스젠더 토크쇼였던 KBS Joy의 ‘XY그녀’(2012), KBS 드라마 스페셜로 방송된 단막극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2011), 여자 고등학생 사이 동성애나 키스 장면을 연출한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2014)은 모두 심각한 수준으로 보수적인 시청자 공격을 받은 것은 물론 방송국 차원에서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론 활동도 없었다.

▲ 2014년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에서의 키스신. 사진=JTBC
▲ 2014년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에서의 키스신. 사진=JTBC

심지어 ‘선암여고 탐정단’의 경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 추천 인사 구분 없이 대다수 심의위원들이 징계 의견을 내리며 한국 사회의 어떤 지체 현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성폭력 문제를 저지르고 사망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자신이 공약에서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제정하기로 약속했지만, ‘성적 지향’ 조항 문제로 점차 머뭇거리다 끝내 2015년 헌장을 제정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였다. 퀴어문화축제가 더욱 활동 반경을 넓히는 동시에, 혐오적 시선도 함께 커지던 것도 이 시기이다.

이전보다는 소수적 성 정체성에 대한 친숙함이나 인식은 증가했다. 그렇기에 대중매체가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퀴어문화축제와 같은 오프라인 행사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지만 이와 함께 혐오와 차별을 앞세운 이들의 맹렬한 반동 움직임도 함께 증가했다. 동시에 주류 매체가 이전보다는 쉽게 성소수자 등장을 허용한다고 해도 수동적 존재를 쉽게 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여전히 미디어를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격동의 2010년대를 거쳐 한국은 이제 2020년대를 맞이하고 있다. 계속 언급했던 대로 분명 한국 미디어가 성소수자를 다루는 양상은 이전보다는 발전했다. 뉴스나 방송은 이제 가십으로 성소수자를 소비하지 않고, 만화나 소설은 물론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매체에도 성소수자 모습은 흔하게 등장한다. 예술영화 영역이긴 하지만 자비에 돌란이나 흑인 게이의 이야기를 다룬 ‘문라이트’, 레즈비언 이야기를 다룬 임대형 연출의 독립영화 ‘윤희에게’는 소소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최소 미디어의 ‘어떤 영역’에선 분명한 진전을 이뤘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주류 매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선’이 쉽게 작동한다. 홍석천이나 하리수가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여전히 민영방송은 물론 공영방송에서도 성소수자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은 제작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주류 대중영화에서는 최근 개봉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와 같이 성소수자를 ‘특이한 캐릭터’ 이상으로 다루는 움직임이 좀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차별금지법과 같이 소수자 차별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

좀더 일상적으로, 그저 ‘특이한’ 캐릭터를 넘어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성소수자가 등장할 때, 성소수자들을 그저 특정한 캐릭터 타입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품에 수도 없이 다양한 유형으로 ‘헤테로’(이성애자) 캐릭터처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 미디어는 진정으로 성소수자를 특정한 위치에 가두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우리 곁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존재로 여기게 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분명 진보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진보에 그저 머무르기만 할 뿐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여전히 통과될 기미가 없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포함해 실제 일상을 바꾸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무수한 매체들이 성소수자들을 다뤄도 진정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고 변희수 하사와 같은 안타까운 죽음들이 이어지고 쉽게 성소수자 요구를 ‘나중에’로 치부하는 상황에선 결코 한국 사회나 매체에 근본적 개선이 이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소수의 목소리를 찾아 나서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기본’이 될 때, 그때 진정 한국 사회나 미디어가 성소수자들을 배제하거나 소외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

* 글의 일부 내용은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가 2019년 발간한 ‘한국퀴어영화사’를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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