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물과 같다. 낮은 곳으로 흐른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은 채 모든 걸 적시며 간다.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힘이라는 말보단 폭력이란 두 글자가 더 어울린다. 물이 한번 쓸고 간 자리엔 흔적이 남는다. 단단한 돌 위로 물이 잠시 지나갔다면 금방 증발해 흔적이 남지 않는다. 돌 대신 얇은 창호지라면 물 한 방울에도 우둘투둘 변한다. 한 방울이 아니라 한 바가지를 끼얹으면 종이는 갈기갈기 찢기고 다시는 붙일 수 없는 구멍이 뚫린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긴 쉽지 않다. 약한 곳을 찾아 세차게 퍼붓는 폭력을 거꾸로 되돌리기 어려운 것도 과연 자연의 원리일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잔혹으로 마음의 병이 깊어진 아들 진섭(김성민)이 식사자리에 등장하기엔 부적절한 어떠한 ‘물’을 아버지에게 분출하는 장면에서 영화 ‘세자매’의 클라이맥스가 시작한다. 이후 세자매는 억눌러왔던 감정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답답함과 분노를 최고조로 끌어오다 이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 영화 '세자매' 주연배우 김선영
▲ 영화 '세자매' 주연배우 김선영

물이 고이면 주변을 부패시킨다. 이를 쉽게 퍼내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 가족과 종교공동체다. 이젠 교회 장로가 된 아버지에게 배다른 아이라는 이유로 세차게 폭행을 당한 첫째딸 희숙(김선영)과 막내 아들 진섭(김성민), 이를 목도하고 용기를 내어 동네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둘째딸 미연(문소리), 아직은 아버지의 폭력과 동네 어른들의 외면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언니를 따라다녔던 셋째딸 미옥(장윤주)은 다들 학대의 반작용 속에서 산다.  
 
아버지에게 맞은 희숙은 여전히 학대후유증에 짓눌려 산다.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대신 시도 때도 없이 남들에게 ‘미안해’한다. 돈이나 뜯어가는 남편(김의성), 애정이 결핍된 채 엄마를 무시하는 딸 보미(김가희)에게 한마디 못하고, 결국 자신의 암 진단 소식을 털어놓을 상대조차 찾지 못한다. 대신 탁한 조명에 좁고 길어 답답한 꽃집을 운영하는 희숙은 꽃으로 자해한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며 자라온 ‘밝은’ 셋째딸 미옥은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산다. 착한 남편에게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다. 미옥이 술에 쩔어 살며 때때로 먹은 걸 게워 내는 것이나 희숙이 스스로 자신의 피를 보는 것은 마치 학대당한 자식들이 성인이 돼서야 내뿜는 또다른 액체, 폭력의 부산물 같다. 

▲ 영화 '세자매' 주연배우 장윤주
▲ 영화 '세자매' 주연배우 장윤주

폭력의 직격탄에서 빗겨난 둘째딸 미연은 겉보기에 가장 ‘잘’산다. 미연도 대다수 기독교인이 따르는 돈의 신 ‘맘몬’을 섬기며 자신의 치부를 주변에 드러내지 않는다. 만들어낸 선(善)으로 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전형적인 위선자로, 삶의 태도는 대부분 기만적이다. 자매들에게는 ‘아버지와 가장 닮았다’는 평을 듣는 미연의 어린시절 상처는 또 다른 폭력이 돼 그의 자녀에게 향한다. 신 앞에 복종하는 ‘주의 종’은 그 스트레스를 또 다른 약자에게 풀기 마련이다. 

미연이 남편 동욱(조한철)의 바람에 대처하는 모습은 기만술책의 정수다. 미연은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데 남편 동욱이 성가대원 효정(임혜영)과 바람난 걸 눈치챈다. 가정이나 성가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파탄이 날 만한 상황이다. 미연은 남편에게 강한 경고를, 효정에겐 나름대로 복수를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게’ 아내와 성가대 지휘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배우 문소리는 마치 모태신앙으로 교회생활에 능한 우리 주변의 ‘집사님’같다. 

▲ 영화 '세자매' 주연배우 문소리
▲ 영화 '세자매' 주연배우 문소리

영화가 세 자매의 일상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가운데 캐릭터의 변화가능성은 감지되지 않는다. 시련이나 도움을 통해 성장하는 서사는 없었다. 오히려 이들의 비합리적인 일상이 과거의 상처때문이라는 사실만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어쩌면 성인들이 쉽게 바뀌지 않는 모습을 자주봐온 관객들에게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결국 가부장제의 자장 속에 살던 세 자매는 가기 싫은 아버지 생일잔치에 기꺼이 모인다. 상처로 얼룩진 아들 진섭의 어떤 행동으로 난장판이 된 식당에서 가족 내 수직질서는 처음으로 금이 간다. 첫째딸인 희숙의 딸 보미가 욕을 섞어가며 할아버지에게 ‘왜 사과하나를 못하는지’ 추궁하고, 둘째딸 미연이 이를 극대화하며 사과를 요구한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없다. 장로인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가 무너진 모습을 목사에게 들킨 것에 상심했는지 머리를 유리창에 찧어 피를 쏟아낸다. 억울한 이야기지만 ‘주의 종’인 아버지는 그 순간 자신을 또 다른 피해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는 폭력의 방향을 거스른 이 사건 이후 세자매는 달라질까. 셋이 어렸을 때 찾았던 바다를 다시 찾고 그들만의 사진을 다시 남기는 장면만으론 알 수 없다. 

▲ 영화 '세자매' 스틸컷
▲ 영화 '세자매' 스틸컷

호평이 도배하는 영화 ‘미나리’(3일 개봉)를 보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세자매’는 근래 영화 중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세자매는 ‘놈놈놈(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이후의 가장 인상 깊은 삼총사가 아닐까 싶다. 국내 상업영화를 성급한 일반화로 혹평하면, 쓸데없는 설명이 너무 많아 ‘관객의 수준을 평가절하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에 비하면 ‘세자매’는 ‘설명’이 아닌 ‘보여주기’에 성공한다. 긍정적 의미의 ‘과잉’된 연기로 관객들 마음에 상황과 감정을 직접 꽂아준다. 물론 믿고 보는 배우인 문소리와 김선영, 코믹한 평소 캐릭터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한 장윤주의 열연 덕분이다. 이 세 배우가 한 포스터에 있는 것만으로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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