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3일 SBS가 설 특선 영화로 방영한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극 중 동성 키스 장면을 삭제하고 모자이크 처리한 일이 있었다. 비판에 부딪히자 방송국은 온 가족이 보는 연휴 저녁에 영화를 편성하면서 폭력적인 장면이나 흡연 장면을 편집하듯 해당 장면도 지웠다는 답을 내놓았다. 성소수자는 허용되지만, 성소수자의 키스신은 안 된다는 것일까.

슈퍼스타 전기를 담은 영화는 성소수자로서 사회의 차별적 시선 속에 게토를 드나들며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함께 하는 과정 또한 담는다. 주인공의 성적 지향뿐 아니라 당시 성소수자가 처한 환경을 영화의 핵심 키워드이자 배경으로 삼기에 동성 간 스킨십을 일부러 빼는 것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여느 15세 이상 관람가 콘텐츠에 적지 않은 키스신이 방영되는 것을 고려하면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적어도 방송국이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싶었다면 해당 장면을 지우지 않거나 반대로 다른 키스신과 같은 심의기준을 적용해야 했다.

▲영화 ‘보헤미안랩소디’ 스틸.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보헤미안랩소디’ 스틸.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성소수자를 배제한 과오를 되새기고 그에 맞선 저항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시도들은 예술과 대중문화를 막론하고 많은 국가의 일반적인 흐름이 되었다. 이는 성소수자 시민권을 인정하고 제도화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말인즉, 동성 간 키스 장면이 정서 상 맞지 않아 지웠다는 주먹구구식 해명은 근본적인 해결일 수도 없다.

성소수자의 전기 영화를 가져오면서도 특정 장면을 삭제한 상황은 방송국이 가지고 있는 성소수자 인권의식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근래 주류 미디어에서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으려 노력하고 이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자세는 적어도 혐오가 옳지 않음을 의식하고 있으며, 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공익적 실천임을 체화해왔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성소수자 콘텐츠를 전면에 내걸면서 성소수자의 구체적인 모습을 지우는 미디어의 이중적 단면은 차별은 나쁘다고 말하면서 사회적 소수자들을 공공장소와 제도로부터 배제하는 근래 한국사회의 교착상황과 다르지 않다. 이는 보궐선거를 앞두고 안철수와 이언주를 비롯한 예비후보들이 망설임 없이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이들도 존중해 달라’고 언급하는 상황을 곧장 떠올리게 한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들을 불편해하는 주류 질서에 따르라고 하거나, 혐오는 나쁘지만 불편해하는 이들의 입장도 고려해서 드러내지 말라는 이야기는 결국 사회적 위계를 무시한 채 정서적 불편함을 호소하며 혐오를 거듭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공론장에서 배제하는 차별을 공약할 뿐이다.

▲사진=pixabay
▲사진=pixabay

여기에는 심의에 차별적 잣대를 적용시키는 미디어의 책임도 적지 않다. 최근의 방송과 언론들이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갖고 인권운동을 비롯한 많은 당사자들과 접면을 넓히고 있지만, 이중 잣대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20년 초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가 강제전역 당하고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비난과 공격으로 입학등록을 포기한 3월 즈음,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가 진행한 트랜스젠더 집담회에 몇몇 PD와 기자들이 참여한 적이 있다. 이들은 당사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방송과 언론의 책무를 이야기하며 트랜스 인권을 지지하는 문구를 남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 이태원 확진자가 늘게 되자 행사에 참여한 기자는 게이 집단만을 표적하여 밤 시간 술집과 클럽에 드나드는 것을 가십화하고 비난했다. 같은 행위도 소수자가 하는 것은 더 외설적이고 무책임해보였을까. 지금도 사무실에는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하라는 그의 문장이 붙어있다. 기자의 선의를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그에게 성소수자는 편견과 낙인에 고립된 이들이기에 누구보다 질서를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으로만 보여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일방적인 대상화이자 차별을 전제한 태도임을 그와 SBS를 위시한 방송언론 종사자들은 알아야 한다.

미디어의 인권 기반 실천은 차별하면 안 되는 피해자의 얼굴을 전시하는 것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성소수자 또한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그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삶의 희노애락을 경험한다. 진정으로 공익을 위한다면 특정 집단 당사자들의 수위를 어디까지 제안할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같은 행위도 특정 집단만을 부각시켜 문제 삼고 검열해온 그간의 궤적을 살피는 것이 어떨까. 당사자의 피해경험을 담으며 혐오반대를 외쳐왔다면, 이제는 이들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공존의 필요를 제안할 수 있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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