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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은어(21)] 초치기
[언론계 은어(21)] 초치기

우리 속담 중에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 개울 물 퍼다가 힘들게 군불 때 해놓은 밥이 잘됐는지 보겠다며 집에 찾아온 이웃이 가마솥 뚜껑을 그르렁 열며 다된 쌀밥 위에 한 줄기 콧물을 주루룩 흘려놓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까요. 밥 짓는 일을 한 사람은 그 밥이 얼마나 아깝겠어요.

우리는 이처럼 한 사람의 실수나 한순간의 행위로 완성된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초를 쳐라 초를 쳐"라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또 실수한 사람에게는 "거 왜 초치고 그래요"라는 항의가 쏟아지기도 하죠.

´다된 밥에 코 빠트리다´는 말은 ´초치다´는 속어적 표현으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치다´가 국어사전(성안당 출판)에 "(나쁜 방향으로) 잘못 되도록 헤살을 놓다"고 적시된 점을 생각할 때 무리한 연결은 아니지 싶습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나요?



"야! 너무 초치지 마라"

기자사회에서도 앞과는 의미는 다르지만 ´초치다´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초치기´라는 표현을 말입니다. 하지만 기자사회 내에서의 용례는 사전적 의미와 많이 다릅니다. 한 선배가 기사를 쓰고 있는 후배에게 "야! 너무 초치지 마라"라고 말했다면, 여러분은 이 말을 "일을 그르치지 마라"라고 들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선배의 말은 "기사를 있는 사실 그대로 써라"고 당부한 것으로 읽어야 더 정확합니다. 너무 양념을 치지 말라는 거죠.

기자사회에서의 ´초치다´는 ´초(식초)를 치다´는 의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식초가 들어가면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대신 본래의 맛과는 천양지차인 맛을 낸다는 두 가지의 의미를 함의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초치지 마라´는 너무 초를 쳐서 원재료(기사를 쓰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증거)의 맛을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발언으로 읽는 것이 타당합니다. 아마 상상컨대 그 선배는 후배에게 최대한 확인된 사실만 쓰라고 요구했을 겁니다. 정치·경제 등 예민한 일들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배가 기사에 양념을 너무 친다면 자칫 소송이나 취재원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러나 기자사회의 ´초치기´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금물입니다. 약간의 ´초치기´는 기사의 맛을 살리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기사에는 독자들이 기사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장치가 숨어 있습니다. 핵심적인 문제에는 벗어나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모을 수 있는 문제나 표현상의 약간의 과장, 적확하지 않지만 흥미를 유발시키는 단어사용 등을 하는 거죠.

그 정도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초치기´를 그렇게 나쁘게 만도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언론계에는 70∼80년대 삼초로 불리는 기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뒤에 ´초치다´할 때 그 ´초´자를 붙인 거죠. 이들이 ´초´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그 중에서 한 선배의 예를 설명할까 합니다. 동아일보 노보 제256호(7월 18일자)의 ´동아유사´ 코너에 <촌음을 후려치는 민초의 ´초치기´ designtimesp=28620>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기자사회의 ´초치기´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음은 기사 전문입니다.

´민초논쟁´을 아십니까.

´죽음의 암벽 803m. 어둠과 함께 휘몰아친 추위와 허기 공포속에 스러져간 일곱 생명을 삼킨 인수봉은 4일 아침 차가운 등을 내보이며 끝내 말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며 빤히 바라뵈는 도심의 불빛을 한스러이 지켜보다 스러져간 산사 나이들은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했다…´  <동아일보 83년 4월 4일자>

서기 1983년 4월의 첫 휴일인 3일 오후 북한산 인수봉 암벽을 등반하던 대학생 7명이 기상이변으로 조난을 당해 숨진 조난사고 기사였다. 오전까지 화사하던 날씨가 정오쯤부터 돌면, 초속 15m의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쳤고, 돌풍속에서 자일이 엉키고 바위틈에 끼여 풀리지 않아 변을 당했다는 말 그대로 ´호랑이 담배먹던 석간시절´의 기사였다.

정말 산사나이들은 서울 도심의 불빛을 한스러이 지켜보다 스러져 갔을까. 아니 인수봉 암벽에서 서울 야경이 보이기나 하는 걸까. 강시 4월4일자 사회면 통단 기사의 리드를 쓴 사람은 인수봉 근처에도 못가본 민병욱 사회부 기자(현 동아일보 논설위원).

바로 ´민초논쟁´의 당사자다. 민기자는 그날 오전 내근이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북부경찰서 상황실로부터 ´인수봉 7, 8명 조난, 악천후로 구조대는 접근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소식. 적어도 3개면은 도배하고도 남을 사건이라 편집국은 비상이 걸렸건만 사건기자들 경찰 연합통신 어디로부터도 더 이상의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 속은 바작바작 타지만 시간은 기자사정을 봐주지 않으니, 어김없이 다가오는 초판 마감. 알고 있는 단 한줄짜리 정보로 기사를 만들어내는 임무는 바로 며칠 전까지 시경캡이었던 민기자의 몫이었다. 마감을 불과 30분 앞둔 오전 10시경. 어쩌랴.

민기자는 눈보라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어간 청춘에 대한 안타까움을 절절이 담은 ´가장 생생한 현장기사´를 써내려 갔다. 급히 백과사전에서 찾은 ´인수봉에서 내려다보면 서울시내가 한눈에 보인다´는 한마디를 가지고…. 그러나 민기자보다도 더 혼비백산한 사람은 바깥의 김충근 시경캡과 장병수 바이스캡이었다.

그날 아침 6시경. 김충근캡은 전날 밤의 숙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채 가까스로 시경기자실에 나왔지만 어쩐 일인지 타사 캡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며 시경 형사과로 걸음을 옮겼지만, 형사과도 마찬가지. 형사과 직원들은 "지금 전 서울시내 기자들이 모두 인수봉으로 달려갔는데 김기자는 여기서 뭐하느냐"며 오히려 김캡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급히 장병수 바이스캡을 찾았다. "대한민국 기자들이 모두 인수봉에 가 있다는데 우리는 뭐하는 거냐" 하늘이 노랗기는 장기자도 마찬가지. 헐레벌떡 우이동으로 내달았으나 산 밑에 겨우 도착한 건 8시경. 산길이 얼어 구두를 신은 채로는 오를 수가 없었다. 양손에 구두를 들고 맨발로 한걸읆을 떼자니…. 시간은 두어 시간뿐인데 시건정보도 전혀 없고 산에 올라갔다만 오는데도 2시간은 넘게 걸릴 상황. 차라리 돌도끼 하나주고 2층집을 지으라는 것이 덜 황당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부모님 임종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게 마감시간. 허둥허둥 산에 올라 다행히 연합통신 S기자에게 20분간 취재 수첩을 빌렸다. 수첩의 내용을 토대로 보충 취재를 해서 산아래 내려온 시간이 거의 10시. 당시 우이동에는 전화있는 집이 흔치 않아서 집집을 헤매다가 겨우 발견한 전화기 한 대. 10분만 쓰겠다고 하고는 1시간 반동안 기사를 불렀다.

그날 이후 편집국에 퍼진 소문 중에는 ´장통(장기자의 별명)´이 맨발로 인수봉을 세 차례나 오르내렸다더라는 믿기 힘든 얘기도 있었다. 김충근캡이 장통을 비롯한 사건기자들에게 "인수봉에서 내려오지 말고 다 죽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니 가능한 얘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하튼 초판이 평소보다 1시간 가량 늦게 나왔지만 지면상으로 볼 때는 오히려 타지를 압도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특히 ´죽음의 암벽 803´으로 시작하는 민기자의 ´작문실력´에 선후배들은 혀를 내둘렀고, 곧바로 사고당한 학생들이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숨져갔다는 기사 문장을 둘러싸고 ´민초논쟁´이 시작됐다.

한마디로 민기자의 ´초치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인 88년 사고현장과 같은 코스로 야간 암벽등반을 한 조병래기자는 정말로 서울시내가 한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사고 당사자들이 당시 야경을 봤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편집국의 가장 ´유서깊은 애칭´ 중 하나일 ´민초´의 주인공 민병욱 논설위원은 기자가 취재를 마치자 "후배들이 그냥 민초, 민초 하는데, 꼭 ´민초선배´라고 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에필로그 하나. 그날 밤 ´대평원´(동아일보 근처 술집 이름)에 모인 경찰기자팀 술자리 내내 김충근캡으로부터 ´개새끼´ ´소새끼´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전통의 동아일보 사건팀다운 위기관리 능력만큼은 분명히 보여줬다는 게 후일 사가들의 평이다.    <경제부 김승진조합원>

신문기자들은 글쟁이입니다. 자신이 쓴 기사를 칭찬 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며, 기사를 폄하하는 것을 가장 듣기 싫어합니다. 기자들이 이 선배를 ´초´라고 부른 데에는 그 선배의 놀라운 추리력과 문장력, 기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부러움이 작용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인지 이들 ´초´들이 출입하는 기자실 기자들은 심리적인 부담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글솜씨와 기사 감각 그리고 취재력까지 뒷받침 돼서 기사를 써대니 당할 재간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타사 기자들은 ´초´들이 잠시만 사라져도 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사회면 1단이라고 생각했던 기사를 ´초´들은 사회면 사이드 톱 거리로 만드니 나머지 기자들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때 그시절에나 있을 법한 황당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계속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기자들이 현장과 취재를 통한 정확한 기사를 쓰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한 채, ´초치기´ 등의 테크닉만 발휘하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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