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이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연예인, 사회단체 인사 1000명을 사찰한 사실이 보궐선거를 앞두고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은 이를 박지원 국정원장의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찰당한 인사들은 정작 너무 늦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사찰 피해자들의 법률소송을 대리한 김남주 변호사(내놔라 내파일 시민행동 법률팀장)는 17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특별법을 만들면 공개하겠다는 박지원 국정원장의 주장을 두고 “사찰정보를 수집, 생산, 배포한 것자체가 불법인데, 공개할 때만 법을 만들어오라는 것은 공개하지 않겠다는 핑계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사찰 문건은 일종의 장물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국정원 사찰 사건이 왜 지금와서 갑자기 불거졌을까. 애초 이 사건은 2017년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사찰 및 동향파악 사실이 드러나자 그 대상자들이 사찰 사실과 문서를 공개하라는 운동을 벌이며 이어져왔다. 문성근, 김미화 등 대표적인 사찰 대상 인사들이 결성한 ‘내놔라 내파일 시민행동’은 국정원에 사찰문건 공개요구를 했으나 기각당했다. 이후 명진스님, 곽노현 전 교육감, 김승환 전북교육감 등이 정보공개거부 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해 긴 재판끝에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국정원에게 정보공개 거부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그 이후 국정원은 주요 대상자들에게 63건의 사찰문건을 제공했다. 내놔라 내파일 시민행동에 따르면, 18인의 신청인 중 한 건이라도 정보공개를 받은 이는 모두 12명이며, 문성근 배우가 23건, 곽상언 변호사 16건, 이준동 영화제작자가 5건, 故 노회찬 의원이 1건, 김승환 전라북도교육감 3건, 주진우 기자 4건, 배진교 국회의원 1건, 문동환 목사 1건, 안진걸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1건, 이덕우 변호사 3건을 받았다.

이 가운데 김승환 전북교육감이 지난달 21일 이 문건을 공개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김 교육감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오늘 기자실에 가서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저에 대한 사찰 기록을 공개했다”며 “A4 용지로 14쪽 분량이지만, 알맹이는 전혀 없는 껍데기 공개”라고 지적했다.

▲지난 2017년 10월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국민사찰기록 정보공개청구 시민운동, 열어라 국정원, 내놔라 내파일’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7년 10월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국민사찰기록 정보공개청구 시민운동, 열어라 국정원, 내놔라 내파일’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김 교육감이 소개한 ‘2009. 12. 16. 민정수석실, 정치인 등 주요 인사 신상자료 관리 협조 요청’을 보면, “O 민정수석실 요청사항 O VIP 통치보좌는 물론 대정부 협조관계 구축 및 견제 차원에서 신상자료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O 민감한 사안인데다 민정수석실 직원들이 관련 자료들을 즉시 축적, 업데이트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우리원에서 보안유지하고 국회의원 전원에 대한 신상자료를 관리해 주기 요청”이라고 나온다.

또 ‘2009. 11. 17. 일일 청와대 주요 요청현황’에는 “<기획비서관 (11. 27한). OOO><내년도 지방선거 출마 예상자 명단 종합 – 각당별 거론.예상되고 있는 16개시도 광역자치단체장 및 교육감 후보 – 지역. 당별 예상 후보를 표로 작성해주되, 광역단체장과 교육감을 구분해서 지원>”으로 기재돼 있다. ‘2010.4.12. 일일 청와대 주요 요청현황(긴급)’이라는 자료엔 “~~~ <민정수석 (4. 13 19:00한). ~~~~> <6. 2 지자체장. 교육감 선거관련 지역별 특이동향 – 광역시도별로 지자체장 및 교육감 선거로 구분, 특이한 부분만 파악>” 등의 주문사항이 적혀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같은 문건이 공개된 후 “명백한 정치사찰”이라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와 별도로 3년 전 국정원이 4대강 사업 민간인사찰을 했던 문건을 공개했던 KBS는 다시 이 문건을 보도하면서 당시 청와대 홍보기획관과 정무수석을 했던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경선후보의 연관성을 조명했다. KBS는 16일 뉴스9에서 국정원이 4대강 반대단체에 ‘세무조사 압박’, ‘반대인물 선정 내부갈등 유도’ 등의 계획이 박 후보에 보고됐다고 나온다고 보도했다. 이 문건은 2018년 국정원이 실체를 인정했다. 박 후보는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고 KBS는 방송했다. KBS는 3년 전 문건 원문을 사이트에 공개했다.

김남주 변호사는 이 사건이 지금 불거진 배경을 두고 “너무 늦었다”며 “특히 국민들 보고 법으로 빼앗아보라고 약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장물 같은 것을 자신들이 만들어놓고, 되돌려주지 않고 있다”며 “박지원 원장이 정보위에서 ‘법 만들어야 줄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서 수집 생산 배포가 모두 불법인데, 공개할 때만 특별법 타령을 하는 것은 공개하지 않겠다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정치공작이라는 국민의힘 주장에 김 변호사는 “이 활동을 2017년도부터 했는데, 그럼 4년전에 이번 보궐선거를 예상해서 활동했다는 것이냐”며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박형준 부산시장 국민의힘 경선후보와 관여 여부를 두고 “여러 문건에는 MB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들에게 수집한 자료를 보고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며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 처벌받지 않아 지금까지 왔다”고 말했다. 그는 “박형준 후보가 정확히 어떻게 개입됐는지는 봐야 하지만, 선거를 앞둔 지금 시점이라해도 그의 관여여부를 밝히는 것 역시 필요하다”며 “공개하고, 사과와 피해배상을 한 뒤 재발방지까지 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박지원 국정원장은 16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MB 국정원에서 직무범위 벗어난 불법 사찰이 있었다’며 ‘국회 정보위원회의 재적 위원 3분의 2 의결로 요구하면 비공개로 보고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했다고 정보위원들이 전했다. 이에 허영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17일 논평에서 “MB정부의 국정원이 자행한 불법 사찰로 인해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진상규명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불법사찰이 왜, 누구의 지시로, 무슨 목적으로 자행되어 왔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은 선거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17일 논평에서 “임기 초에도 안 보였던 문건이 보궐선거를 코앞에 둔 이 시점에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과연 우연일까”라며 “아무리 선거가 급하다 해도 지겨운 ‘전 정부 탓’과 음습한 정치공작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민주당 소속 시장들의 성 비위로 치러지는 선거에 공작이 왜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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