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가슴속에 아픔 한 조각 정도는 품고 살기 마련입니다. 그 아픔으로 난 생채기에 고춧가루를 뿌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이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기 마련입니다. 어쩌다 ´툭´ 내뱉은 말에 친구가, 혹은 연인이 ´독설´로 맞받아 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아픔´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삿거리가 된다고 생각해서 ´죽어라´ 발품을 팔아 만든 기사가 보도되지 못할 때의 기분은 정말 ´뭐´ 같죠. 동시에 ´내가 이 회사를 다니면 뭐하나´라는 비애와 허탈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요.

그래서 기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Kill´입니다. 테스크가 "야 이거 킬해" "뭐 기사를 이렇게 썼어, 시간 없어. 킬해"라고 말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입니다. 그날 은 여지없이 데스크를 안주삼아 코가 돌아가도록 술을 마시죠.

그 놈의 ´킬´이란 놈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슬며시 다가와서 ´몸 버리고 마음 골병들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기자사회에서 ´킬´은 보고한 취재 아이템이 기사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때나 상대적으로 기사 가치가 적은 기사가 마감시간에 촉박해 들어올 경우에 데스크나 선배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기사를 죽여 보도하지 말라는 뜻이죠.

킬 = "기사 죽여 보도하지 마라"

잠시 더 부연 설명하자면, 기자들은 편집과정에서 기자 크기를 줄이거나, 기사 전체를 삭제할 때 "야 그거 죽여"라는 의미로 "킬 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야 그거 들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자들이 ´킬´이란 말을 가장 많이 듣는 시절은 당연히 수습 때입니다. 의욕은 앞서지만 기삿거리 찾는 일이 모래밭에서 ´사금´을 찾는 것보다 힘들게 느껴지는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반짝거리는 것과 봐도 가슴 떨리며 ´혹시´ 기삿거리가 아닐까 쉽게 흥분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수습은 선배들이 훈육 속에서 사금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 연재에도 말씀드렸듯이 수습기자는 사회부 경찰기자를 시작으로 기자생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수습들은 경찰 1진 기자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의 취재영역을 하나하나씩 개척합니다. 물론 선배들은 수습들에게 ´아이템(기삿거리) 보고´를 거의 매일 지시하고, 그 내용을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 도제식 교육을 하게 됩니다.

조선일보 한 선배의 수습 시절 얘깁니다. 그 선배는 자신이 발견한 아이템이 정말 특종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경찰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아이템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선배, 이건 특종입니다." /"확실하지" /"예" /"그래 그거 혹시 중앙이나, 동아 기자는 모르지"/ "아~ 참~~ 선배! 정말로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이지"/ "그러면 지금 빨리 가서 두 회사 중 한 기자에게 이 얘기 해줘라"

´띵´… 그 선배는 다리가 휘청거리면서, 잠시 혼란에 빠졌을 겁니다. 힘들게 잡은 특종을 타사 기자에게 얘기해줘라(?). 기삿거리가 안 된다는 말이죠. 저는 선배와 후배기자의 대화를 곱씹어 볼수록 기자사회의 ´익살´과 ´해학´ 그리고 취재현장의 한 단편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지만 기자사회의 ´킬´은 해프닝으로만 기억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쓴 단독기사가 편집과정에서 지면을 못 찾고 다른 기사에 쫓겨 도망 다니다가 결국, 배달판에서 누락되는 경우를 상상해보십시오. 기사를 쓴 기자는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흔히 운때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거죠. 예를 들면, 남북정상이 만난 날, 경부고속철도 비리를 단독보도 한다면 그 기사가 제대로 보도되겠어요. 기자는 이럴 때 속 쓰리죠. 이 정도 기사가치도 안 되는 기사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죠.

정권비리 보도, 특종잡고도 ´킬´!

신문은 지면 별로 성격이 있습니다. 종합면, 사회면, 정치면, 문화면 등 각 지면은 고유한 성격을 가집니다. 기자들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지면 분류에 따라 부서 배치를 받습니다. 하루는 문화부 기자가 사회면 기삿거리를 취재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사회면 기사도 넘쳐서 다 못 싣는 상황이라면, 문화부 기자가 취재한 기사는 지면 할당을 받지 못할 것은 뻔합니다. 당연히 문화부 기자가 취재한 기사는 통상 있는 네 번의 판갈이 과정에서 사회면, 종합면 등을 떠돌다가 배달판에서 기사가 빠지는 거죠.

´킬´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흔치는 않지만 자기가 쓴 기사도 아닌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 기사가 나가는 경우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기사는 선배가 쓰고 후배 이름을 사용한다거나, 내근 기자가 취재하고 자신의 취재영역과 관련한 기사라는 이유로 임의로 자신의 이름이 달려나가는 경우 말입니다.

하지만 경우는 비슷해도 기자에게 가장 큰 아픔으로 기억되는 것은 희대의 특종을 잡고도 데스크가 ´킬´ 시켜서 보도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한 기자는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하더군요. 정권의 비리와 관련된 기사라고 하더군요.

언론사도 권력과 자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가 여기서도 발견됩니다. 여·야당 편향지, 보수·진보지 등 신문에도 여러 가지 평가가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논조와 배치되거나, 보도 후 올 불이익이 두려워 보도하지 못하는 사례도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렇듯 기자에게 ´킬´은 수습시절의 추억으로, ´비밀´의 공간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의 의미로 남는 펄펄 살아있는 ´은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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