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야로´의 경우처럼 황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우리말을 일본어로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한 주일 동안 선배들에게 ´야로´의 의미가 뭐냐고 물어보고 의미를 캐봤지만 일본어 사전에는 이 말이 없었습니다.

선배들은 ´빠가야로´라는 남자를 욕하는 일본말은 있어도 ´야로´라는 말은 없다고 말하더군요. 처음에는 ´야료´라는 말의 변종인 줄 알기도 했습니다. 야료(惹鬧)는 생트집을 하면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일본에서는 ´부랑자들이 야료를 부리다´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본어 사전과 선배들의 조언에도 ´야로´라는 말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이런 말이 있단 말인가. 허탈해할 무렵 한 선배와 일본어 사전과 한글 사전을 함께 뒤적이며 ´야로´를 찾다가 허망한 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한글 사전 한귀퉁이에 보란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우하하. 거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말이 바다를 건너서 일본어의 근본이 됐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비슷할 줄이야.

한글 사전에서 찾아낸 ´야로´

야로는 한글 사전에 남에게 숨기고 있는 우물쭈물한 셈속이나 수작, 흑막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로 "그 일에는 분명히 야로가 있을 거야"라는 말로 사용하는 거죠.

"이거 분명히 야로가 있어. 알아봐." 데스크들은 동물과 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랜 취재 경륜·경험이 쌓여서 형성된 것으로 데스크들은 뭔가 구린 냄새를 잘 맡는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사안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비틀고 꼬고 잘라보는 거죠.

팩트를 훌륭한 음식으로 만드는 요리사라고 할 수 있겠죠. 기자들 사이에서 우스개 소리로 쓰는 ´사시´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바로 살아라´는 스파이크 리의 영화처럼 기자들은 숙명적으로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시´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자들의 직업을 비꼬는 말임과 동시에 기자들의 삶이 그만큼 척박하다는 자조가 배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슬픈 현실은 데스크나 일선 기자들의 예측이 정확히 맞는 경우가 더 많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가 그만큼 깨끗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 있는 거죠. 정부·기업 하다 못해 시민단체들까지도 공식적인 발표 이면에는 숨기고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야로´가 낳는 오보, 추측보도

기자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예측을 너무 밀고 나가다 보면 오보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야로´가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보나 추측보도는 신문사들간의 생존경쟁이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합니다. 선정적이지 않으면 독자들이 읽지 않는다는 것이죠.

기자란 직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자사회 밖에서는 기자들이 모두 썩은 것처럼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정론직필이라는 부담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회사의 보도태도와 자신의 기사와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합니다.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서 기자직의 인기가 급속히 떨어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보수가 적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언론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자사회 내부에서조차 언론이 사회를 비판하는 기능보다 정보전달자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언론은 변하지 않는다는 고루한 개념의 언론상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시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기자들이 벤처로 이직하는 현상도 언론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말하는 증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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