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판 성격을 띠는 ´가판´ 신문

한국신문의 대표적인 병폐 중 하나가 이른바 ´베끼기´ 관행입니다. 신문기자들은 공식적인 퇴근시간이 저녁 8시입니다. 7시30분 경에 배달되는 타사의 ´가판 신문´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판 신문을 발행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몇 되지 않습니다. 미국, 일본, 한국 정도이고, 특히 10개 중앙지와 경제지 모두가 가판을 발행하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합니다.

가판 신문은 오지에 다음날 새벽 시간에 맞춰 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시험판적인 성격이 더 강합니다. 권력의 ´눈치보기´를 위해 신문사간에 서로 보도수위를 조절하거나 의제를 비슷하게 설정하기 위한 ´정언유착´이 낳은 관행이라고도 할 수 있죠.

서울의 경우 가판신문을 보기 위해서는 저녁 8시 이후 가판대에서 구입하거나 가판 배달업자에게 한달 10만원 가량의 배달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죠. 따라서 정부부처나 대기업 홍보실 등 정보흐름에 민감한 곳에서 주로 가판을 봅니다. 자신들과 관련한 비판기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비판기사가 나갔을 경우 권력이나 광고를 이용해 로비와 압력을 넣어 사전에 보도를 차단하는 거죠. 때론 신문사에서 기사를 이용해서 광고 등의 거래를 하기도 한답니다.

베끼고 바꾸다 보면 ´그 나물에 그 밥´

그래서 신문들이 서로 기사를 베끼고 바꾸는 과정을 거치면 서울 독자에게 배달되는 10개 중앙지의 배달판 내용이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합니다. 가장 마지막에 서울판 판갈이를 하기 때문이죠. 가판이 나오면 기자들은 자사 신문에서 누락됐거나 편집방향이 다르게 보도된 내용을 체크합니다. 만약 누락되거나 잘못된 내용이 보도되었을 경우 스크는 담당기자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 취재나 기사보강을 지시합니다.

기자들은 다음 번 판갈이에 맞춰 다시 기사를 쓰고, 때로는 새로운 기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에 하기 때문에 취재가 부실해질 수밖에 없고, 1보를 쓴 타사 기사를 베껴야 하는 경우도 생기죠. 대개 그대로는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기사를 베끼고 전화 몇 통화로 보강 취재를 합니다. 이미 타사에 보도됐다면 쓸데없이 취재할 필요없이 표현만 살짝 바꿔서 자신이 취재한 것처럼 하는 겁니다.

이런 취재관행은 한국신문의 특수한 시스템에서 출발하지만 기자들의 ´잔꾀´도 녹아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일본·미국의 경우, 타사 가판에서 보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처럼 베끼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아무리 큰 특종이더라도 자사 기자가 충분히 보강취재를 한 다음에 늦게는 일주일 후에 보도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우라가에스 - 뒤집다, 계획을 변경하다

이처럼 기사의 내용이나 핵심을 살짝 돌려서 쓰는 것을 기자 사회에서는 ´우라까이 한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일본어에는 ´우라까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비슷한 것이 있다면 ´우라가에스´(裏反す) - ´뒤집다, 계획을 변경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동사가 있을 뿐입니다. 제 생각으론 ´우라가에스´가 지금의 ´우라까이´로 변화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교열기자협회 민기 고문의 자문에 의하면 기자사회에서는 이전부터 ´우라까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사물의 속이나 내부를 대체하다 바꿔치기 하다"는 ´리체´(裏替)로 표현했다 합니다. 일제시대에는 양복 안쪽에 덧댄 비단이 낡았을 경우에 ´바꾸다´는 의미로 ´우라까이´라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단벌 신사들이 한 벌의 양복을 오래 입다가 비단 안감이 먼저 닳았을 때 "우라까이 했다"라고 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편집국장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국장이 바뀌면 부장이나 죄없는 일선 기자들까지 죄다 목이 잘려나가고 대체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 기자들은 "우라까이 했다"고 불렀답니다.

일선 기자들이 부드러운 ´염문´으로 쓴 기사를 데스크에 보내면 데스크가 임의로 딱딱한 ´격문´으로 바꿨을 때나 자기 기사를 빼고 다른 사람 기사로 대체했을 때도 "우라까이 했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바꾸다´라는 처음 의미와 비교해 볼 때 "다른 사람의 기사를 베껴서 기사내용을 돌리거나 바꿔서 쓰다"라는 지금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야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래 뜻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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