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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 사설] 언론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
[미오 사설] 언론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
미디어오늘 1288호 사설

“주로 상업적 목적으로 전단지를 만들지만, 정치적 내용이나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광고지 혹은 리플릿(leaflet)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어(散らす|지라스-뿌리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찌라시라는 표현으로 통용된다.”

위키백과 속 ‘지라시’의 정의다. 본래 일본에서 지라시는 인쇄물 속 쿠폰을 오려낼 수 있는 광고지를 일컬었다. 현재 지라시는 사실인 양 냄새를 풍기며 미확인 정보를 확산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의 그 무엇이다.

과거 하늘에다 뿌린 ‘삐라’와 같은 지라시는 오늘날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 등 여러 플랫폼을 타고 확산된다. 흔히 카톡에서 ‘받은글’이라고 표기된 지라시 유통은 무차별적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목적 자체가 확산인 까닭이다.

지라시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사실 확인 및 검증 최일선에 있는 기자들이다. 지라시 정보는 간혹 사실로 확인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미확인 정보로 남는 게 보통이다. 의혹 단계의 내용이 지라시에 담겨 있다면 이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언론에 지라시를 검증하는 필터링 역할을 기대하는 이유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지라시를 퍼뜨려 사회 혼란을 조장하기도 한다.

▲ 지라시. 소문 일러스트. 사진=gettyimagesbank
▲ 지라시. 소문 일러스트. 사진=gettyimagesbank

최근 확인되지 않은 편지글이 기사화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 수감된 후 확산된 ‘이재용 편지’에는 “이제 이 나라를 떠나려고 생각한다. 제가 받은 형기는 다 채우겠다. 사면이란 구걸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황당한 내용이었지만 사람들은 이재용 편지를 퍼 날랐다. 이재용 부회장이 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을 계속 지원하겠다는 공식 입장이 나오면서 가짜 편지로 판명 나긴 했지만 누가 왜 이런 편지를 퍼뜨렸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건희 회장이 사망했을 당시에도 수년 전부터 나돌았던 ‘어느 갑부의 편지’라는 제목의 글이 인터넷에 확산됐는데 ‘수법’ 비슷한 지라시였다. 물론 언론은 이재용 가짜 편지에 속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사실 유무와 상관없이 ‘확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지라시 목적이 있다면 이재용 가짜 편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가짜 편지를 기사화한 보도를 보고 누군가는 웃고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도 가짜 편지는 교묘한 지라시 수법으로 말썽을 일으켰다. 일례로 프랑스 파리 시장이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면에 연방 상원의원직에 출마한 캐롤라인 케네디를 비판한 편지글은 대표적 가짜 편지로 오보 사례에 꼽힌다.

그나마 이재용 가짜 편지는 언론에 의해 가짜라고 보도됐지만 지난 주말 “‘박원순 그런 사람 아냐’ 아내 작성 추정 편지 퍼져”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기사들은 무책임했다. 편지를 썼다는 당사자 확인도 거치지 않았고 ‘추정’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보도를 정당화했다. 언론이 지라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비판에 할 말이 없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배우자 강난희씨가 직접 쓴 편지가 맞는다는 관계자 발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당사자 최종 확인을 거친 보도는 없다. 편지 내용 진위와 더불어 파급력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당사자가 공개를 원하는지도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지만 언론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기사화는 정황이 짙은 의혹을 제기하거나 확정된 사실을 활자화한다는 의미이지만, 강씨 편지글 보도는 이 같은 저널리즘 원칙에 벗어나 있고 언론 윤리도 저버렸다. 추정 단계에서 강씨 편지글을 기사화했던 언론사에 소속된 한 기자는 “창피하다”고 전했다. 언론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은 숱한 유혹에도 보도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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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윤리헌장을 독자들이 2021-02-15 18:33:51
숙지해서 제대로된 언론이 어딘지 가려야할 지경

적어도 언론에 공개된거면 2021-02-15 18:32:27
편지를 쓴 사람의 동의는 구하고 실었는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