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사망 진상조사에 참여한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청주방송의 ‘21개 과제’ 이행에 낮은 평가를 내렸다. 정량 평가를 하면 70% 넘게 권고안을 이행했으나 실질을 보면 핵심 조항을 위반하거나 권고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청주방송은 2023년 1월까지 총 5번 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 이행 상황을 통보한다. 통보는 지난 1월까지 3차례 진행됐다. 진상조사위는 청주방송에 총 5개 분야 21개 과제 이행을 권고했다. 진상조사위 간사를 맡았던 윤 변호사는 지난해 3~6월 이재학 PD 사망 경위와 청주방송 비정규직 노동 환경을 조사했다. 지난 3일 윤 변호사를 만나 청주방송 이행 평가를 들었다.

▲지난 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한 윤지영 변호사. 사진=손가영 기자.
▲지난 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한 윤지영 변호사. 사진=손가영 기자.

이재학 동료 ‘무늬만 프리랜서’ 상황 그대로

21개 중 5개 과제는 이행되지 않았다. 이 중 3개는 이행 기한을 넘겼고 2개는 기한을 남겨뒀다. 나머지 16개 과제는 이행됐으나 윤 변호사는 이 중 6개는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가령 노동자성이 확인된 비정규직 경우 진상조사위는 직접 고용을 권고했다. 그러나 부분적인 임금 인상 등 처우 개선만 이뤄졌고 근본적 구조 개선은 없었다는 평가다.

작가 직접고용 과제가 대표적이다. 청주방송엔 크게 TV·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편성제작국’ 방송작가와 각종 행사 기획·행정을 맡는 ‘기획제작국’ 작가가 있다. 이들 프리랜서 9명은 통상 주 5일 정직원처럼 규칙적으로 출·퇴근하고 본인 업무 외 추가 업무도 일상적으로 맡으며 관리자 지휘를 받으면서 일해 높은 전속성이 인정됐다.

노사가 꾸린 ‘고용 구조 개선 TF’는 직접고용 방안은 수립하지 않았다. 임금 인상과 계약서 일부 변경에 그쳤다. 고용 안정을 위해 계약서에 ‘귀책 사유 없이 계약 내용을 임의로 취소·변경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원고료 책정 기준을 세분화하고 금액도 인상했다. 제작한 프로그램이 불방돼도 보수를 받도록 개정했다. 이는 ‘편성제작국’에만 적용된 변화다.

기획제작국 작가들은 배제됐다. 기획제작국은 고 이재학 PD가 속했던 부서다. 이들은 명칭만 ‘작가’일 뿐 기획사 직원과 같았다. 청주방송이 수주하거나 주최한 행사의 기획부터 진행, 정산까지 모든 과정 실무를 맡았다. 이들은 프리랜서로 ‘행사 당 보수’만 받았다. 행사가 몰린 성수기엔 밤을 새우며 일해 보수를 받았지만 비수기엔 소득이 턱없이 줄었다. 사내에서 고용 불안 정도가 가장 높았다. 이들은 기본급 보장을 원했지만 TF는 결론을 내지 않고 끝났다.

윤 변호사는 “근본적으로 임금인상, 고용안정 방안 모두 노동자성이 인정된 이들의 직접고용을 전제로 권고됐다”며 “그러나 TF는 이 최종 목적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비정규직 대표도 뽑았지만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이었고 TF는 이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논의 기구는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진상조사위는 CG·운전·행정 직군의 파견노동자들에 대한 고용안정 방안도 아직 통보받지 못했다. 이 밖에 청주방송은 외주업체에 고용됐던 고령의 청소·경비 노동자 4명은 촉탁직으로 직접 고용했다. 진상조사 결과 노동자성이 인정된 조연출과 불법파견이 확인된 MD 등 직원 9명 중 3명은 올해 초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나머지 6명 경우 지난해까지 연도별로 전환 확약을 맺어야 했다. 대상자 선정 기준에 이견이 나오면서 계속 논의 중이다.

▲청주방송이 2020년 7월 언론노조·유족·시민사회대책위 등과 합의한 이행 과제 현황(2021년 1월 기준). '이행기한' 중 괄호가 없는 항목은 모두 2020년 날짜다. 디자인=안혜나 기자.
▲청주방송이 2020년 7월 언론노조·유족·시민사회대책위 등과 합의한 이행 과제 현황(2021년 1월 기준). '이행기한' 중 괄호가 없는 항목은 모두 2020년 날짜다. 디자인=안혜나 기자.

사망 1년, 책임자 징계 안 끝나

윤 변호사는 “가장 큰 문제는 고인의 사망 책임과 관련한 부분”이라며 “청주방송이 항소심 조정 절차와 관련해 합의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청주방송은 이재학 PD가 제기했던 근로자지위 확인소송 2심을 법원 조정으로 종결한다고 합의했으나 5개월 전 입장을 번복했다. 조정안 문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처음엔 청주방송 대주주인 이두영 이사회 의장이 ‘사망 책임 통감’ 문구 삭제를 요구했고 이후 ‘부당해고’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유족은 지난 4일 청주지법에 소송 재개 신청서를 냈다.

윤 변호사는 고인이 사망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책임자 징계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진상조사 결과 확인된 책임자 4명 중 2명만 징계 절차가 끝났다. 부당해고 및 소송 방해 책임자인 전 기획제작국장은 고인 사망 8개월 후 해고됐다. 또 다른 소송 방해 책임자인 전 경영국장은 정직 3개월 징계를 받았다.

소송 방해에 개입한 나머지 2명의 징계 절차는 시작되지 않았다. 이 PD는 청주방송 임직원들이 자신의 소송을 도운 직원들을 회유한 사실에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이를 두고 대책위에선 “관련 직원이 회장 측근이라 미룬다”는 비판이 나왔다. 청주방송은 “진상조사위가 징계를 권고한 직원들을 순서대로 인사위에 회부하느라, 그리고 반론을 충분히 듣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밝혀 왔다.

윤 변호사는 “회사가 책임자 징계에 노력한 점을 부정하진 않지만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사실이니 추측과 의심이 나온다”며 “2월 중 징계를 개시하라고 회사 측에 권고했다”고 밝혔다.

내부 지침을 만들거나 직원들에 교육·심리 지원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의 과제는 대부분 지켜졌다. 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운용방안이 담긴 ‘제작 인력 운용 매뉴얼’을 마련했다. ‘존중·배려 일터 선언문’을 채택해 공개 발표하기도 했다. 성평등위원회·고충처리위원회 등에 비정규직이 추천하는 외부위원 참여도 보장키로 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 예방 교육도 매년 실시한다.

▲2017년 '아름다운 충북' 자료 화면. 오른쪽이 고 이재학 PD 모습이다.
▲2017년 '아름다운 충북' 자료 화면. 오른쪽이 고 이재학 PD 모습이다.

“비정규직 남용, 방송사 노조 자기 문제로 봐야”

객관적 지표에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개선 의지’ 부분이다. 윤 변호사는 “진상조사위는 이 사건을 한 지역 비정규직 PD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방송 비정규직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 구조적 사건으로 봤다”며 “근본 개선이 없다면 또 다른 이재학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결과를 보면 다른 방송계로의 파급효과는 전혀 없어 보인다”고 비판했다.

청주방송엔 여전히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남아있다. 윤 변호사는 “회사는 최선을 다한다고 밝힌다. 할 수 있는 만큼 다했다는 것인데, 회사는 최선의 정도를 애초 100 중 50 이하로 잡은 게 아닌가”라며 “잘못을 바로 잡는 과정이 아니라 시혜적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한다”고 말했다.

항소심 합의 위반은 회사 의지를 가늠한 대표 사례다. 윤 변호사는 “청주방송이 왜 이제와서 조정 문구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회사는 이사회 반대, 그리고 이사회 내 변호사들 반대를 이유로 든다. 말이 안 된다. 조정 문구는 법 이론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당사자 간 협상 문제다. 회사가 무시하고 조정 절차를 거쳐도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윤 변호사는 노동조합에도 아쉬움을 표했다. 노조는 회사의 합의 이행을 견제해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대표 기구다. 윤 변호사는 “회사와 비정규직 직원 관계는 너무 불평등하다. 그래서 중간 역할이 중요한데 그 중간이 없었다”며 “언론노조는 합의 후 사실상 이행 감시·감독에서 손을 뗐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래서 유족과 회사가 일대일로 남아 서로 대립하고, 나머지 민주노총 충북본부, 방송 비정규직 단체 등이 유족을 서포트하는 모양새가 된 게 아닌가”라고 짚었다.

▲청주방송에 명예복직한 고 이재학 PD의 사원증이 그의 납골함 앞에 놓여있다.
▲청주방송에 명예복직한 고 이재학 PD의 사원증이 그의 납골함 앞에 놓여있다.

특히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수용하는 등 노조로서 할 수 있는 근본적 고민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그 예로 이행 과제 하나인 ‘노사협의회 비정규직 대표 참여’를 노사가 모두 거부한 사실을 들었다. 정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대표로 참여시키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다만 회사는 ‘특별위원’ 자격으로 참여를 보장한다고 밝혔다.

윤 변호사는 이를 “진상조사위의 권고 취지와 맞지 않다”고 봤다. 이 사건은 ‘입직 경로’와 별개로 노동자성이 인정된 직원은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점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이재학 PD 사건은 방송사 프리랜서, 파견·용역노동자 남용 실태를 알렸다. 이들 모두가 방송사를 유지하고 방송 송출·제작 등 생산 과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지난해 12월 이두영 의장이 밝힌 언론노조의 중재 시도에 대해서도 윤 변호사는 “매우 부적절했다”고 비판했다. 이 의장이 3개월째 항소심 조정 문구를 거부하던 때였다. 중재 과정에서 이 의장은 이미 7월에 서명을 끝낸 합의와 다른 내용의 추가 합의를 요구했다. 유족에게 ‘향후 이재학 PD 사건을 언급하지 말라’는 요구까지 담았다. 이 요구가 언론노조를 통해 유족에게 전달되며 대책위 내에서도 논란이 커졌다고 알려졌다.

윤 변호사는 “이 문제는 중간 어느 지점에서 타협할 수 없다. 회사가 약속을 이행하도록, 잘못은 바로 고쳐 잡도록 압박해야 했다”며 “사안을 이해관계 산물로 보고 타협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판단한 결과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또 “언론노조가 비정규직 문제를 제3자 입장에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고 풀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청주방송은 2022년 1월, 2023년 1월 두 번에 걸쳐 나머지 이행 사항을 진상조사위에 통보한다. 진상조사위는 3번째 점검 회의가 열린 후인 지난달 26일 이행이 미흡한 과제마다 보완책을 요구하는 공문을 청주방송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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