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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은어(3)] 하리꼬미
[언론계 은어(3)] 하리꼬미

"추워죽겠는데 왜 이렇게 안나오는 거야 XX" "쉿! 조용히 해"
비릿한 냄새가 날 듯한 어두운 골목길 차안에서 두 명의 형사가 잠행하는 장면을 영화에서 보셨을 겁니다. 영화는 현실과 꿈 사이를 저울질합니다. 저도 이런 장면을 보며 왠지 형사는 멋있는 직업일거라는, 그래서 형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지금 같은 겨울이라면 따듯한 방구들에서 등을 지져야 할 시간에 전혀 조우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려야 하는 거죠. 한마디로 아주 고생스런 기분 찝찝한 일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이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기자들도 똑같이 해야겠지요. 하지만 형사들은 기자들의 동행취재를 마땅치 않게 생각합니다. 방해도 될뿐더러 어떤 꼬투리를 잡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기자들은 형사를 몰래 감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늘 정신을 차려야 하는 고통스런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언론계에서는 이런 잠행취재를 '하리꼬미'라고 표현합니다. 잠복해 감시한다는 뜻으로 형사들의 용어를 빌린 일본어죠. '사쓰마와리'라고 불리는 경찰이나 법조 출입기자들이 주로 이런 일을 맡게 됩니다.

MBC 뉴스데스크를 맡고 있는 김은혜기자도 하리꼬미 때문에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MBC의 한 선배는 "한번 하리꼬미하면 남자기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스러웠다. 며칠씩 머리를 감지 않아 떡이 되어도 자리를 뜨지 않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리꼬미와 유사한 우리말이 있습니다. '뻗치다'입니다. 요즘은 하리꼬미보다 '뻗치다'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국어사전에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닿다'는 의미이지만 오래 참고 견딘다는 '버티다'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법조기자들의 경우 검찰이 공개하길 거부하는 거물급 인사의 소환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로 서울지검 앞에서 뻗치게 됩니다. 얼마 전 한나라당 이신범의원이 "KBS 추적 60분팀과 말지 기자들이 국가정보원의 사주를 받고 나를 감시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죠.

이것도 취재팀이 정형근의원 집앞에서 뻗치는 과정에서 벌어졌습니다. 저는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취재팀과 이를 막기 위해 정의원 집에 온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실랑이를 '무삭제(?)'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국회의원이라는 공인은 국민의 알권리 앞에서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 침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의원 발언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뻗칠 때에는 항상 공익과 사익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 하지만 취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저 같아도 그럴 용의가 있습니다.

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의 한 의원 집 앞에서 뻗치던 기자가 의원에게 빰을 맞기도 했습니다. 이 의원은 "아침 새벽부터 집 앞에서 계속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뷰하기 싫다고 해도 한 번만 만나자고 했다. 집사람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갑자기 화가나 그랬던 행동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이래저래 기자란 직업이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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