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청와대가 마주보이는 분수대 광장은 저마다 최후의 방식으로 대통령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더 이상 길거리에 나오지 않아도 되리라 기대했던 세월호참사 유가족들도 그 중 하나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25일 저녁부터 다시 촛불을 들었다. 지난 19일 검찰 세월호참사특별수사단(특수단)이 1년2개월의 수사 끝에 △청와대∙법무부의 수사외압 △기무사∙국가정보원의 유가족 사찰 △단원고 임경빈 학생 구조 방기 의혹 등을 모두 무혐의 판단한 일이 기폭제가 됐다.

이날 저녁엔 ‘박근혜 청와대’ 최전선이었던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 광장까지 약 500m 거리의 길목 곳곳에 촛불이 세워졌다. 참사로 딸을 잃고 7년 째 ‘예은아빠’로 불리는 유경근씨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함께해준 가족과 시민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유경근씨는 페이스북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굉장히 작은 불빛입니다만 이런 불빛이 다시 한번 우리들의 요구가 청와대에 전달이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진짜 촛불을 들면 좋겠는데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며 “촛불을 그저 인화물질, 위험한 물질로 보는 시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유가족들은 시위를 앞두고 “촛불혁명 때 사용하던 LED 촛불 또는 관련 LED 용품을 갖고 오셔도 된다”고 전했다. 

▲25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에서 2014년 4.16세월호참사로 아들을 잃은 '경빈엄마' 전인숙씨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25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에서 2014년 4.16세월호참사로 아들을 잃은 '경빈엄마' 전인숙씨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다시 켠 촛불 “여기까지 오는 게 다였구나”

지난해 11월 시작된 ‘경빈엄마’ 전인숙씨의 1인 시위는 25일로 440일을 넘겼다. 전씨는 구조 직후 헬리콥터에 실린 줄 알았던 아들이 실제로는 배를 타고 4시간40여분 뒤에야 병원에 이송된 사실을 6년 만에 알게 됐다. 그날부터 무작정 나온 청와대 앞에서의 시간이 1년을 훌쩍 넘었다. 검찰 특수단은 경빈군 구조 방기 의혹 또한 무혐의로 판단했다. 분수대 앞 농성장에서 기자와 만난 전씨는 “박근혜 정부 때 여기까지 들어오기 힘들었던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여기까지 들어오는 게 다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고개를 떨궜다.

“2014년 검찰이 발표했다. ‘세월호는 사고였고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때 전달받기로 경빈이는 헬기를 타고 나왔다고 했었다. 그랬던 사람들(검찰)이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처음 했던 말을 뒤엎기 어려운 상황 아니었겠나. 그게 쉬운 일일까.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려면, 청와대가 밝히려는 의지가 있다면, 대통령의 의지 섞인 말 한 마디가 정말 절실하다.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무작정 왔다. 여기라도 와 있어야 (대통령이) 목소리를 내줄 것 같았고, 찾아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취임 첫해였던 2017년 8월 문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청와대 영빈관에 초청했다. 청와대가 어디 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곳에서 번번이 막혔던 유가족들은 처음으로 청와대 정문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 가족들은 “이럽게 쉽게 청와대 문이 열릴 수 있었는데 그동안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생각하니 억울하고 문 대통령에 대한 감사함에 눈물이 났다”고 대통령에게 연신 감사했다. 그러나 2021년 겨울, 가족들의 발길은 겨우 청와대가 보이는 곳에 묶였다. 지난 22일엔 유가족의 삭발식이 있었다.

▲2017년 8월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초청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청와대
▲2017년 8월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초청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청와대

대통령의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청와대 참모진이 다녀간 일은 몇 차례 있었다. 익히 알려진 김제남 시민사회수석, 전임이었던 김거성 전 시민사회수석 등이다. 전씨는 “찾아올 때마다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믿고 기다려 달라’.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진상규명해준다는 뉘앙스였다. 그 말을 처음 듣고 햇수로 3년째 분수대 앞에 있다. 바뀐 문구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지난 연말 대통령이 아닌 시민사회수석 차원에서라도 메시지가 나올까 기대도 있었지만 그 역시 “희망고문”이었다. 전씨는 “청와대에서 찾아올 때마다 ‘대통령이 직접 나오지 못하지만 의지를 표했다’ ‘오전에도 회의를 했다’고 하는데 우리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전씨는 유가족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비춰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답답함을 전했다. 

“특수단에 의하면 (헬리콥터를 타고) 병원을 갔다 한들 경빈이는 살아 있을 확률이 적었다, 그래서 무혐의 처분했다고 한다. 제가 원하는 답변은 그게 아니다. 구조방기가 왜 일어났는지, 해경이 왜 그런 상황에 그런 조치를 했는지 문제를 제기하는데 마치 내가 그들에게 ‘살아있는 애를 일부러 죽였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일은 상상하기도 싫다. (뭘 더 밝히냐고 하는데) 우리가 계속해서 원하고 이야기했던 사안들을 제대로 되짚어서, 끝까지 뭘 원하는지, 책임자들이 어떤 답변을 하지 않고 있는지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 대통령에게 어떤 답변을 듣고 싶은지 물었다. “우리가 원하는 답변이든 원치 않는 답변이든, 답변을 좀 주셨으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연장됐는데 진상규명을 위해 일을 한다면, 기록이나 진술을 위해 관련자들을 부를 것 아닌가. ‘코로나 때문에 힘들다’, ‘몸이 안 좋다’며 안 나오는 경우가 많을 거다. 적어도 ‘사참위가 오라고 하면 가야 하는구나’ 생각하게끔 대통령이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다. 나는 아들을 두 번 보냈다. 2014년 4월16일 아무 생각 없이 힘들게 보냈고, 2019년 아들의 영상을 보면서, 정말 너무 힘든 상황에서 아들을 보냈다. 이 정권에서는 부모들마저도 ‘가만히 있으라’고 할 건가.”

▲지난 1월22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4.16연대
▲지난 1월22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4.16연대

35년째 해고 노동자, 항암 뒤로 한 김진숙의 발길도 청와대 앞으로

세월호 농성장으로부터 서너걸음 옆에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복직을 촉구하는 이들이 있다. 이날로 35일째 단식 중인 송경동 시인은 세월호 농성장을 바라보며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일으켜세워준 분들을 저렇게 홀대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문재인 정부의 인권의식이라고는 아예 없다”며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을 통해서 세워진 정부 아닌가”라고 혀를 찼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1986년 이후 35년째 해고자 신분이다. 1981년 한진중공업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현장직에 대한 반인권적 차별을 해소하고자 노동조합 대의원이 됐다. 대의원 대회 내용을 정리해 동료 조합원들에게 알리고, 노조의 어용성을 비판하며 대자보를 붙였다. 1986년 5월 출근길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대공분실에선, 관 속 시체 밑에 깐다는 ‘칠성판’ 위에서 고문을 당했다. 이후 박종철 열사가 목숨을 잃은 장소다. 김 지도위원이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나올 때마다 회사는 그를 다른 곳으로 배치전환했다. 결국 회사관리자들이 그의 출근을 막아서기에 이르렀고, 김진숙은 무단 결근 등을 이유로 해고됐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는 지난 2009년과 2020년 두 차례, 김 지도위원이 부당하게 해고됐다며 복직을 권고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김 지도위원이 해고무효소송에서 패소했다는 이유로 그를 복직시키고 퇴직금을 주면 ‘배임’이라며 버티고 있다. ‘항소’가 뭔지 개념도 몰랐던 김진숙이 아무 대처도 하지 못한 채 확정됐던 판결이다. 한진중공업 법정관리사인 한국산업은행도 복직 요구를 외면해왔다. 

▲25일
▲25일 오전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에서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송경동 시인 페이스북

공권력이 책임을 외면한 사이 김 지도위원의 암이 재발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도보투쟁이 지난해 12월30일 부산에서 시작됐다. 청와대 분수대 앞 단식농성은 같은 달 22일부터 시작됐다. 김 지도위원을 비롯한 부산에서의 행렬은 내달 7일 청와대 앞에 도착할 전망인데, 그때까지 단식농성이 이어질지는 가늠할 수 없다.

분수대 앞 농성장에는 송 시인과 서영섭 신부,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우 권리찾기유니온 활동가, 정홍형 금속노조 부양지부 수석부지부장 등 5명이 곡기를 끊었다. 단식 35일 째였던 25일엔 전국 각지의 시민 798명이 연대 단식에 돌입했다. 하지만 천막 하나 없는 분수대 앞 단식은 한계에 이르고 있다. 지난주 단식 농성자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녹색병원 의료진은 단식을 끝내야 할 때라고 했다. 위태로운 단식을 이어가던 중 기자와 만난 송 시인은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위해 “도대체 무슨 사실을 더 확인하고 무엇을 더 보태야 하느냐”며 힘 주어 말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민주화위원회 뿐 아니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도 유례 없이 여야 합의로 복직 권고안을 냈다. 한진중공업이 있는 부산시의회에서도 여야 전원합의로 복직 결의안을 촉구안을 내줬다. 한진은 주채권사인 산은 지침을 받아 운영되는 회사다. 산은은 100% 국책은행이고 이동걸 행장도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다. 국책은행으로서 국가기관이 부당해고임을 재차 확인해주고 복직권고를 내렸는데 업무상 ‘배임’이라니 말도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산은이나 한진중공업 입장에 현 대통령, 청와대, 정부, 국회의원들이 사실상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 중인 송경동 시인. 사진=송경동 시인 페이스북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 중인 송경동 시인. 사진=송경동 시인 페이스북

송 시인은 김 지도위원을 해고 상태로 방치한 한국사회를 두고 “노동자들의 최소 권리, 권익을 배제하고 기업 편에 정치가 함께 서서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탄압하는 역사의 반증”이라고 표현했다. 

“한진중공업만 봐도 1991년 박창수 열사가 국가공권력에 의해 거의 살해당했다. 2003년 김주익 열사가 부당한 정리해고에 항의할 때 체포영장 발부해 농성자들 잡겠다고 압박한 것도 공권력이다. 이들 모두 한진중공업 지회장이었다. 김진숙은 35년 이상을 부당해고에 맞서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 싸우며 고통받았다. 그래서 지금 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고 단식을 하고 이렇게 싸우는 것이다.”

김 지도위원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청와대에 가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물었다. 왜 하필 청와대로 가냐고.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눈빛을 다시 보고 싶다. 86년도에 87년도에 최루탄을 마시면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그 눈빛이 맞는지, 91년도 박창수위원장의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거리에서 함께 투쟁했던 그 눈빛이 맞는지, 그리고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저에게 끝까지, 승리할 때까지 투쟁하라고, 복직할 때까지 투쟁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전 언제까지 투쟁을 해야 하는지.”

▲25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 전경. 사진=노지민 기자
▲25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 전경. 사진=노지민 기자

송 시인은 김 지도위원의 발언에 대해 “과거 한때 민주화운동의 동기였던 대통령에게 본인 문제를 풀어달라 청원하는 게 아니다. ‘당신과 내가 그 엄혹하던 시절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등 평화를 위해 이야기했던 마음이나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짜 ‘노동존중’ 정부라면, 최소한의 사회적 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청와대가 비공식적으로나마 전한 입장은 ‘노사 문제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변뿐이다. 송 시인은 “김진숙 해고 사유 자체가 국가공권력에 의한 폭력이고, 국가가 해고를 시킨 당사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간 해직자 복직과 관련해 한진중공업은 거의 모든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면서 ‘김진숙 만은 안 된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가 ‘경총과 전경련이 김진숙 복직만은 반대한다’더라. 2011년도 희망버스로 97명 정리해고자의 전원복직을 이끈 데엔 김진숙의 목숨을 건 투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진숙은 자신의 복직을 미뤘다.”

인터뷰 도중 송 시인이 누군가를 붙잡아 “꼭 이야기 들어보시라”며 기자 앞에 앉혔다. 분수대 앞에서 매일 절 투쟁 중인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김진숙의 오랜 친구다. 박 지도위원은 2019년 자신을 위해 부산에서 영남대의료원까지 걸어왔던 김진숙을 떠올렸다. 2007년 영남대의료원에서 해고된 박 지도위원은 2019년 7월1일 74m 병원 옥상에 올랐다. 당시 고공농성은 마지막 수단이었다. 의료원을 소유한 영남학원, 그 주인인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의 집 앞에서도 3000배를 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렇게 오른 곳에 찾아온 김진숙은 13년 만의 복직 현장에도 함께했다.

▲25일 저녁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을 촉구하는 청와대 앞 농성장. 사진=노지민 기자
▲25일 저녁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을 촉구하는 청와대 앞 농성장에 꽃이 꽂혀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김진숙 동지가 유방암 진단받고 수술도 받았던 때였다. 대인기피증이랑 우울증 때문에 거의 바깥 출입을 안 했다. 그런데 내 투쟁이 길어지니까 부산서 부채 하나 들고 출발해 사람들이 경악했다. 죽비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그때는 옛날 휴대전화라 gps 기능도 없지 않나, 간부들이 김 동지 찾으러 부산에도 갔는데 서로 연락이 안 돼서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고….”

박 지도위원은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김진숙이 이제서야 35년 만에 자신의 투쟁에 나섰다”고 말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청와대까지 들어오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민들이 휴가를 많이 내셔서 김진숙의 천리길 희망 뚜벅이 길에 참여해주셨으면 좋겠다. 단지 걸어오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고, 노동자의 길이고, 해방의 길임을 우리가 현장에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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