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영화와 같이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방송노동 현장이 고용형태와 노동관계 등 건설업과 같은 산업구조를 지녔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방송산업 현장은 안전사고 위험에 더해 장시간 불규칙한 노동이 겹쳐, 건설업으로 치면 ‘발주처’이자 ‘원청’인 방송사 직접규제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뒤따랐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4개 단체와 정의당 강은미, 유정주·홍정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일 오후 한빛센터 창립 3주년 행사로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발표 및 과제 도출을 위한 온라인 토론회를 열었다. 단체들은 이 자리에서 지난해 방송계 직군별로 245명을 설문하고 15명을 심층 면접한 실태조사 결과를 밝히고 개선 방안을 내놨다.

방송계는 건설업과 같이 계약 관계가 고용계약부터 위탁, 도급 등으로 다양하고, 노동자의 계약 상대방도 방송사와 제작사, 팀장에 이른다. 기간도 무기한과 일급제가 공존한다. 조사에 참여한 박기형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실태조사 결과를 요약하며 “방송 진행과 공연은 프로젝트 기반으로 작품이나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업무를 분업해서, 그것도 다양한 고용형태로 일정 기간 한정해 일하게 된다. 이는 마치 건설업에서 하나의 건물을 올리는 작업과도 유사한 형태”라고 말했다.

▲박기형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가 20일 온라인 토론회에서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박기형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가 20일 온라인 토론회에서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안전보건공단 산하 안전보건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14~2018년 5년간 방송영화 제작현장에서 164건의 산업재해가 발생했다. 박 활동가는 “넘어짐과 추락이 가장 많고 3개월 이상 치료를 요하는 경우가 85건이다. 한번 터지면 심각한 부상을 초래한다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지난해 드라마 촬영 중엔 차량씬(scene) 사고나 세트장 붕괴, 외부 촬영 중 안전장비나 장치 미제공, 촬영 장비에 의한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방송현장의 유해·위험은 노동자 일상 깊숙이 자리해 있다. 박 활동가는 “이재학 PD와 이한빛 PD 사례는 방송계 산재가 안전사고로만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 근원은 고용 불안정과 장시간 노동”이라고 했다.

조사 결과 모든 면접자가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못한다’는 점을 직무상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다. 설문에서 퇴근 뒤 출근 시간까지 12시간 이상 확보되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은 74%에 달했다. 안전보건공단이 2017년 다양한 직군을 반영해 실시한 ‘5차 근로환경 조사’ 결과인 9%와 크게 차이 난다. 한 1년차 스타일리스트는 조사에서 “진짜 다양한 업무를 하는데 제일 끔찍한 건 드라마 현장”이라며 “3~6개월은 못 쉬고 그냥 묶이고, 핸드폰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한다. 거의 잠을 못 자다 보니까 진짜 아슬아슬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되게 많다”고 했다.

▲박기형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가 20일 온라인 토론회에서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박기형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가 20일 온라인 토론회에서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방송 노동은 불규칙하기까지 하다. 매주 근무 일수·매일 근무시간·출퇴근 시각이 일정하지 않다는 답변이 60~71%로, 일반 근로환경조사 결과인 15~23%보다 크게 높았다. ‘근로 일정이 바뀌지 않는다’는 답변도 5%에 그쳤다. 근로환경 조사에선 76%다. 방송노동자 27.5%는 ‘근무 일정 변경이 발생하고 이를 당일 통보받는다’고 답했다.

박 활동가는 “장시간·야간 노동으로 수면이 부족하면 주의력이 떨어진다. 안전사고 위험이나 뇌심혈관계·근골격계질환, 정신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직무 스트레스로 촬영 현장엔 업무 긴장도가 높아지고 폭언과 폭행, 일터 괴롭힘 환경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응답자 가운데 언어폭력을 경험했다는 답변은 근로환경 조사 결과의 4배, 모욕적 행동을 겪었다는 답은 6배가량이었다. 성별에 따라 폭력 경험도 격차가 있었다. 여성 가운데 22%, 남성 가운데 18%가 언어폭력을 겪었다.

▲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결과, 매주 근무 일수·매일 근무시간·출퇴근 시각이 일정하지 않다는 답변이 60~71%로, 일반 근로환경조사 결과인 15~23%보다 크게 높았다.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보고서 갈무리.
▲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결과, 매주 근무 일수·매일 근무시간·출퇴근 시각이 일정하지 않다는 답변이 60~71%로, 일반 근로환경조사 결과인 15~23%보다 크게 높았다.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보고서 갈무리.

박 활동가는 “방송 노동 현장의 산업재해 문제는 ‘다치고 아픈 건 노동자 개인 몫’이라는 인식”이라며 노동자가 아프거나 다치면 ‘공상처리’하는 관행을 꼽았다. 그는 “단지 노동자가 산재 제도를 이용하지 못하는 문제를 넘어 건별 사후대응에 그쳐 예방과 원인 규명, 문제 제기와 개선까지 막는다”고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방송제작 환경에 작동하지 않는다. 김동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산안법은 방송노동자의 안전 보건 문제를 규율할 수 있는 유일한 법이다. 그런데 산안법이 밝히는 안전보건체계상 △이사회 보고 승인 △안전보건관리책임 △안전관리자 △보건관리자 △안전보건관리담당자 △산업보건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의무 대상은 50인 이상 사업장이어야 하는데, 제작사의 90%는 50인 미만”이라고 했다.

김동현 변호사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사업활동이 이뤄지는 것을 고려해 사업장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사업 기준으로 안전보건관리체제를 구성해야 한다. 예컨대 장시간 대규모 인원의 촬영제작 활동이 독립적으로 이뤄지는 드라마촬영의 경우에는 사업 기준으로 해당 드라마만을 대상으로 하는 안전보건관리 체제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변호사는 방송사의 안전환경 책무를 인정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실제 방송산업구조상 저작권이나 자금 측면 등 방송사가 여러 권한과 책임을 지닌다. 방송사는 자체 제작과 외주를 불문하고 동일하게 의무를 져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비 계상과 가이드라인 이행, 모니터링 시스템에서 책임이 필요하다”며 “개정 산안법에도 건설업의 경우 발주자가 문책 대상 범위에 포함됐다. 방송산업의 경우도 방송사가 발주처로서 실질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4개 단체와 정의당 강은미, 유정주·홍정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일 오후 한빛센터 창립 3주년 행사로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발표 및 과제 도출을 위한 온라인 토론회를 열었다. 유튜브 갈무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4개 단체와 정의당 강은미, 유정주·홍정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일 오후 한빛센터 창립 3주년 행사로 2020년 방송현장 산업안전 실태조사 발표 및 과제 도출을 위한 온라인 토론회를 열었다. 유튜브 갈무리

박 활동가는 “방송과 영상 콘텐츠 진흥과 같이 국가가 개입하는 산업일수록 국가가 무엇을 기준 삼고 지원 및 요구하느냐가 중요하다. 국가가 전체 규범과 규제를 직접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고, 자율적 관리를 위한 지원책은 부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우석 방송통신위원회 지상파방송정책과 과장은 토론에서 “작년 말 재허가 심사에서 이재학 PD와 유지은 아나운서 등 방송사 내부 비정규 고용실태가 거론됐고 비정규직 실태와 처우 개선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며 “비정규직 처우 개선 부분이 다음번 재허가 심사에 반영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에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제작현장엔 외주제작사 계약을 맺은 노동자나 촬영편집 담당 파견직 등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다양하다”고 추가 질문하자 김우석 과장은 “재허가 심사 대상이 방송사이므로 조사와 개선 대상은 방송사가 직접 고용하는 계약과 파견직, 프리랜서에 한정된다. 그 외에는 고용노동부로 질문이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최재훈 고용노동부 산재예방정책과 사무관은 “근로관계 담당자에게 의견을 전달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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