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국회의원·장관 옆은 되지만 대통령 옆엔 못 서는 수어통역사
국회의원·장관 옆은 되지만 대통령 옆엔 못 서는 수어통역사
수년간 이어진 수어통역사 배치 요구…정부·국회 수용했지만 청와대는 묵묵부답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 이후 장애단체 “실망”…신년 기자회견도 그대로일까 우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수어 차별개선 앞서야, 의지만 있으면 어려운 일 아냐”

문재인 대통령의 2021년 신년사가 발표된 뒤 청각장애인들은 또 한번 실망감을 드러냈다. 올해는 대통령과 함께 선 수화언어(수어) 통역사를 볼 수 있으리란 바람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각장애로 듣지 못하는 농인에게 입말로 하는 한국어는 외국어나 마찬가지다. 한국수화언어법은 농인들이 수어로 모든 생활영역의 정보를 얻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수어 제공 환경은 뒤처져 왔다. 수어가 지닌 ‘국어와 동등한 지위’는 좀처럼 법조문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수어를 제공하지 않는 기관들은 ‘현실적 문제’를 내세워 왔다. 예산이 부족해서 통역사를 둘 수 없다, 자막으로 보면 되지 않느냐, 영상에 통역사가 추가되면 화면을 해친다는 이유로 수어통역 요구를 거부했다. 농인 입장에서 수어 동시통역 없이는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태도에 따른 의미·해석을 알아보기 어렵고, 관련 예산 편성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우선순위가 낮은 부수적 요구로 치부돼왔다.

상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은 2020년이다. 수어통역 요구에 난색을 밝혀왔던 공공기관들이 수어통역을 본격화했다. 장애단체는 물론 현역 의원 요구에도 꿈쩍 않던 국회가 지난해 8월부터 기자회견장 수어통역을 도입했다. 추혜선 전 의원에 이어 수어통역 관련법을 대표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국회가 마련한 최초의 수어통역 기자회견장에 섰다. 9월부터는 지상파 3사(KBS·MBC·SBS) 메인뉴스에 수어통역이 도입됐다. 주요 정부부처 발표의 경우 2019년 12월부터 수어통역이 시행된 가운데, 지난해 2월부터는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 코로나19 브리핑 자리에도 통역사가 함께 서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9년 12월2일 문체부 정례 기자회견(브리핑)을 시작으로 정책 발표, 국경일 행사 등에 수어 통역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은 수어통역이 제공된 첫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진곤 문화체육관광부 대변인(왼쪽)과 수어통역사. 사진=문화체육관광부
▲문화체육관광부는 2019년 12월2일 문체부 정례 기자회견(브리핑)을 시작으로 정책 발표, 국경일 행사 등에 수어 통역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은 수어통역이 제공된 첫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진곤 문화체육관광부 대변인(왼쪽)과 수어통역사. 사진=문화체육관광부

공공영역의 수어통역 확대는 수어 통역사의 위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면 한 구석 작은 동그라미 안이 당연했던 통역사가 정부 관계자나 국회의원 옆에 서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코로나19 브리핑 초기, 방송사들이 통역사를 제외한 발표자만 화면에 담으면서 논란이 불거졌던 때도 있다. 당시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재난 상황에서의 정보 접근권에는 차별금지와 인권의 원칙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된다”며 “수어 통역이 한국어 발표자와 동등하게 화면에 잡히도록 촬영과 편집 관행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정부 발표자와 통역사가 비슷한 비율로 잡힌 화면이 어색하지 않다. 불과 몇 개월 동안 이뤄진 변화다.

지난해 5월엔 인권위가 청와대의 수어통역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옆 수어통역사’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다. 당시 인권위는 수어통역사를 두지 않는 청와대가 농인을 차별했다는 진정을 ‘방송사의 수어통역’을 이유로 기각하면서도, 본질적인 책임이 청와대에 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를 향해 “수화언어 사용자의 언어권에 대한 책무는 청와대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보다 무겁게 부과돼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진정을 제기했던 장애인권단체 ‘장애의벽을허무는사람들’(장애벽허물기)은 지난 연말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기자회견 등 수어통역사 배치 △청와대 홈페이지 동영상 수어통역 △청와대 국민청원 수어게시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난 11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는 높아진 기대를 꺾고 말았다. 청와대가 마련한 수어통역은 없었고, 신년사를 생중계한 방송사들의 수어통역은 들쭉날쭉했다. 당시 문 대통령 신년사를 수어통역과 함께 내보낸 방송사는 KBS·MBC·SBS 등 지상파 3사와 국정홍보채널 KTV 정도다. 종합편성채널인 JTBC·TV조선, 보도전문채널 YTN, 서울시출연기관인 TBS 등의 중계화면에선 수어통역을 찾아볼 수 없었다.

▲11일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를 생중계한 각 방송사의 유튜브 생중계 화면 갈무리.
▲11일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를 생중계한 각 방송사의 유튜브 생중계 화면 갈무리.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TBS, SBS, KTV, MBC.

그나마 수어통역을 진행한 방송사 화면에서도 수어통역사의 모습은 최소화됐다. 연설 주요 내용이 요약된 띠자막 끄트머리, 한두 글자 정도가 들어갈 공간에 통역사가 배치됐다. 화질이 낮은 상태에선 통역사의 손짓과 표정을 명확하게 알아보기 어려웠다. 유튜브 화면의 경우 채널 구독을 권하는 배너가 통역화면 일부를 가리기도 했다. 한 장애단체 활동가 표현을 빌리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다 안 들리기를 반복한 것과 마찬가지”다. 농인들은 전 국민 대상의 대통령 연설조차 편히 보지 못한 것이다.

조만간 있을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도 전향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수어통역 여부가) 미정이고 방송사들과 협의하고 있다”고 했지만, 내부 기류는 부정적이다. 여러 관계자들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어 현장 인원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유인데, 인원이나 거리 조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각 방송사가 진행하는 통역을 청와대가 별도로 할 필요가 있느냐는 시각도 있으나, 모든 방송사에 통역을 강제할 수 없고 통역사별로 일부 표현이나 메시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농인들 우려가 있다. 한번 시작한 통역은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하는데 범위나 상시성이 고민이라는 전언도 있다. 문 대통령이나 핵심 참모진의 결단 없이는 신년사와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김철환 장애벽허물기 활동가는 “일반 시민에게 수어와 한국어가 동등하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상징적 인물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수년 간 장애단체들은 수어에 대한 차별개선을 위해 정부, 국회, 청와대가 수어통역사를 배치하라고 요구해왔다. 정부가 먼저 이를 받아들였고, 예산 문제로 곤란하다던 국회도 바뀌었는데 정작 청와대는 묵묵부답이라는 지적이다. 김 활동가는 “과거와 달리 공적 정보는 수어로 통역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그 필요성을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의지만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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