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에 주로 중심적으로 의존한다고 보는 것은 대표적 오해다. 자본주의는 유급노동에 대한 착취만이 아니라 돌봄과 가사노동같은 무급노동에 대한 강탈에 의존하고, 무엇보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대가없는 약탈에 의존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진보와 생산력 발전은 자연과 생명을 강탈하는 기술의 진보’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이러한 야만적 본질은 노예무역, 공유지 약탈, 농민과 식민지 수탈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초축적 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모든 털구멍과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탄생했다’고 했다. 시초축적이 자본주의 탄생 초기에만 있었다고 보는 것도 대표적 오해다. 시초축적(강탈적 축적)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계속 동반돼 왔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자본주의에서 특히 더 진실이다.

후발 자본주의로서 한국 자본주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희생시키며 그 피와 죽음 위에 압축성장하고 ‘한강의 기적’을 거쳐 오늘날 G11에까지 추격 진입할 수 있었다. “자본은 사회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마르크스) 법이지만, 한국 사회와 국가는 그런 ‘강요’를 한 적이 없다. 이것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그 토대가 형성돼, 군부독재 시대에 본격적 축적의 궤도에 오르고, 오늘날로 이어진 한국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이었다.

이번에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이 비록 통과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들이 후퇴하고 반쪽짜리가 된 점이 있더라도 역사적 전진과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윤 추구와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불법 범죄이고 처벌받아야 한다는 선언이고,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드라이브가 직면한 중요한 브레이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법안 통과 이후 한국경총은 “유감스럽고, 참담함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했고, 자본가 기관지로 유명한 <한국경제신문>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중대 시장경제 파괴처벌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 고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씨가 지난 1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 해단식에서 포옹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공동취재사진
▲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 고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씨가 지난 1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 해단식에서 포옹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공동취재사진

따라서 이것이 ‘많이 부족하고 아쉽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성과’(이용관)이며,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힘을 모아서 만든 끝이 아니라 시작. 용균이에게 할 말이 조금 생겼다’(김미숙)는, 가장 앞장선 투사로서 한겨울 장기단식까지 벌인 유가족들의 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분들이 하나도 이룬 게 없다고 말할 생각도 없고 그건 사실도 아니라고 본다. 물론 아쉬움과 한계를 더 크게 보고 이 법을 ‘없는 게 나을 쓰레기’라며 반대하는 분들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예컨대 지난 연말에 아르헨티나에서 14주 이내 낙태 합법화가 통과됐을 때, 그것이 ‘거대한 역사적 승리’라는 목소리뿐 아니라, ‘14주 이후는 처벌이 가능한 또 다른 차별과 배신’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듯 말이다. 근본적 변혁에 이르지 못한 모든 운동은 요구의 100% 성취가 아닌 어느 선에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평가의 기준은, 그 운동이 얼마나 폭넓은 지지와 연대를 구축하고, 어떤 정치적 효과를 이루며, 다음 투쟁을 위한 디딤돌을 놓았는지에 있다.

그 점에서 이번에 구축된 지지와 연대가 2016년 촛불 국면과 비슷할 정도였다는 게 두드러진다. 유가족이 앞장서고, 민주노총과 정의당을 비롯한 원내외 진보정당들이 모처럼 힘을 모았고, 시민사회의 전폭적인 응원이 있었다.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과 열린민주당, 민주당 지지 시민과 그룹들에서도 광범한 지지와 연대가 나타났다. 한겨레, 경향 등의 개혁언론과 친민주당 성향의 유튜브들도 목소리를 보탰다.

이것이 중도층을 움직였고 민주당을 압박하고 우파 정치세력과 언론들도 노골적으로 막아서지 못하게 만들었다.(물론 국힘당은 막판 표결에서 거의 모조리 반대, 기권했다.) 조중동 등은 간간히 태클거는 기사들을 내보냈지만, 대대적인 여론몰이와 주도자들에 대한 마녀사냥, 신상털이 등은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이제 기업경영이 범죄가 됐다’고 한탄하며 ‘그 법으로 동부구치소 방치한 추미애부터 처벌하라’고 짜증냈다.

이것은 검찰개혁과 공수처 개정안 통과 국면과는 대조적이었다. 총선 직후로 돌아가 복기해보면, 여름부터 윤미향 마녀사냥, 의사파업, 8·15를 정점으로 한 태극기부대의 진격 속에 반전을 꾀하던 우파의 시도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180석을 기반으로 임대차3법, 공정경제3법, 공수처 개정안 등을 강행하는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 듯 했다.

그러나 우파 정치세력과 언론은 ‘추-윤 갈등’으로 프레임을 비트는데 성공했고, 개혁 주도자들의 신상털이와 마녀사냥을 지속했다. 검찰개혁 지지자들은 비이성적 광신도들로 매도당했고, 결국 3년을 끌던 공수처가 겨우 출범할 때는 ‘야당의 비토권을 무시한 여당의 독주=폭정=전체주의’라는 프레임까지 형성됐다. 진보 정치인과 홍세화, 강준만같은 지식인도 여기에 목소리를 보탤 정도였다.

아직 촛불의 여파가 남아있고, 아래로부터 압력이 존재했기에 가까스로 개혁법안들이 통과되긴 했지만, 알맹이가 빠지거나 반쪽짜리가 되는 일들이 반복됐다. 이 과정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광범한 연합은 구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축소, 와해됐다. 법조기자단을 고리로 개혁언론들도 대체로 검찰 편에 섰고, 기득권 카르텔의 일부인 사법부에서도 편향적 판결들이 쏟아졌다.

이제 민주당의 보수적 주류와 문재인 정부의 상층부는 더욱 더 기득권 카르텔에 길들여져 눈치를 보면서 타협과 양보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의사국시 구제, 이명박근혜 사면론, 검사출신의 민정수석, 김앤장 출신의 공수처장 등이 그 신호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과정에서도 민주당 주류, 산자부와 법무부와 중기부 관료들은 국힘당과 함께 기업이익의 전달벨트로서 구실을 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할수록 민주당의 주류는 더욱 더 타협과 양보로 기울 것이다. 관료들은 더욱 더 개혁을 사보타주하고 복지부동할 것이다. 기재부는 복지확대와 재정확장을 한사코 막을 것이다.(홍남기는 개각 대상으로 아예 거론도 되지 않았다.) 검찰은 개혁정책을 직권남용으로 걸고, 사법부는 보수적 판결로 막아설 것이다. 주류언론은 민주당에서도 친기업적 보수파인 양향자 등을 띄워주며 기층운동과 연계가 있는 개혁파(박주민, 이탄희, 윤미향 등)를 계속 물어뜯을 것이다. 진보정당과 지식인들의 민주당 비판을 반개혁의 맥락에서만 이용할 것이다.

기득권 카르텔의 정치적 경험과 자원은 풍부하고, 상대편의 틈과 약점을 노리는 교묘한 전술은 오랜 세월 속에 갈고닦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좌파는 다시 한번 힘을 모아내면서 시민사회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층까지 파고들면서 광범한 지지와 연대를 구축하고, 우리의 의제를 정치적 중심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파의 부활을 막으며 민주당을 넘어선 왼쪽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 그러려면 우리도 원칙과 선명한 구호만이 아니라 시의적절한 판단과 전술이 필요하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노엄 촘스키의 조언은 귀담아 들을만하다.

“전술은 단지 주변에 두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어떤 활동가나 조직자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두 번째 본성이어야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여러분이 말하고자 하는 것,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이해하게 할 수 있을까? 구호를 외친다고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작업, 조직화와 활동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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