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회장 이동걸)이 키코 불완전판매를 부인하는 이동걸 산은 회장을 비판하는 칼럼을 보도한 스포츠서울 기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기자 개인을 상대로 기사 정정이나 반론이 아닌 손해배상 요구에 나서 ‘입막음용’ 소송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스포츠서울은 지난 10월18일 ‘이동걸의 이상한 논리 “키코, 불완전판매 했으나 불완전판매 아니다”’란 제목의 기자 칼럼을 냈다. 권오철 기자는 칼럼에서 이동걸 회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국감에 출석해 중소기업들에 키코를 판매하며 “(키코 옵션의) 가격 정보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시인하면서도 “불완전판매가 아니다”라고 말한 점을 꼬집었다. 칼럼은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도 불완전판매가 아니라는 이 회장의 논리는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말과 동일하다”고 썼다.

키코 사태란 은행에서 판매한 ‘키코(KIKO)’라는 통화옵션상품으로 인해 중소기업 50여곳이 줄도산 하는 등 700여곳이 3조 규모 피해를 본 사태를 말한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기업(고객)이 미리 약정된 환율과 금액에서 외화를 팔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환율이 약정범위 상한선보다 높아지면(Knock-In) 시장 환율보다 싸게 외화를 팔고, 하한선보다 낮아지면(Knock-Out) 계약을 무효로 쳐 기업이 위험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 마디로 환율이 오를수록 업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상품이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펴며 기업들의 부도로 이어졌다.

▲10월18일 스포츠서울 칼럼.
▲10월18일 스포츠서울 칼럼.

대법원은 2013년 키코 사건에서 사실상 은행 측 손을 들어줬으나 이듬해 은행 직원 간 통화녹취록이 뒤늦게 공개됐다. 2018년엔 양승태 대법원 재판거래에 키코 사건이 이용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금융감독원은 법원 판결을 받지 않은 피해기업 신청을 받아 분쟁 조정에 나섰다. 분쟁조정위원회는 불완전판매를 인정하고 은행들에 배상을 권고했다. 우리은행을 제외한 모든 은행이 권고를 따르지 않았고, 산은은 유일하게 배상 자율조정 은행협의체에도 불참한 상황이다. 현재 경찰이 키코 사건을 재수사 중이다.

산은은 칼럼이 허위라며 손해배상 1억원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문제 제기 취지는 이 회장이 칼럼 제목처럼 “불완전판매했다”는 표현을 쓴 적 없다는 것이다. 권 기자에 따르면 산은 홍보팀이 보도 이튿날 항의해 스포츠서울 측이 직접인용 표현을 홑따옴표로 바꿨고, 현재는 ‘이동걸의 이상한 논리 ‘키코, 불완전판매 했으나 불완전판매 아니다’’로 수정된 상태다. 그러나 산은은 권 기자 개인을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했다.

산은은 보도에 대한 정정이나 반론 요구가 아닌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산은은 소장에서 “권 기자는 이동걸 회장이 키코 상품 판매가 불완전판매였음을 인정이라도 한 듯한 제목의 기사를 게재해 산업은행이 심각한 오해를 받도록 보도해 산업은행의 기존 입장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산은이 기존 입장을 번복해 불완전판매를 인정한 것처럼 비춰져 키코 상품 판매와 관련된 손해배상 책임을 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사진=민중의소리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사진=민중의소리

권 기자는 “제목과 기사에서 이 회장이 ‘불완전판매가 아니다’라 주장했다고 분명히 썼고, 칼럼을 오해한 기사가 재생산된 바도 일절 없다”며 “국가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책은행장이 기자를 상대로 무리한 주장을 펴면서 대형로펌을 고용해 억대 소송을 벌이는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사를 쓰는 기자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로밖에 해석하기 어렵다”고 했다.

키코 피해기업들이 결성한 키코공동대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키코 피해기업에 사죄하고 배상해도 모자랄 판에 공익을 위해 기사를 쓰는 기자를 겁박하는 국책은행은 상상하기 어려우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기자를 상대로 낸 소송을 즉각 취하하고 피해기업에 대한 마땅한 책임과 의무를 다 하라”고 밝혔다. 이들은 “이 회장이 언론인을 상대로 소송에 나선 것은 국책은행에 들어가는 세금을 들여 언론 자유를 겨냥한 것”이라며 “키코 피해기업들도 공동대응하기로 했다”고 했다.

키코 사태를 심층 취재했던 타 언론사의 A 기자는 “금감원 분쟁조정위도 불완전판매를 인정한 상황이다. 기사 제목이 나타내는 취지도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는데, 이 회장의 입말과 똑같이 표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책 은행이 기자 개인에 손배를 거는 것은 입을 다물라는 신호로 보인다. 개인이 보도에 대한 법적 분쟁을 감당하게 만들어 압박감이 들게 하는, 국책은행이 해선 안 될 일”이라고 했다.

▲산업은행 로고
▲산업은행 로고

최근 하나은행과 우리은행도 행장이 언급된 비리를 보도한 언론사와 기자 제소에 잇달아 나서면서 은행권의 소송을 통한 비리보도 대처가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은행과 권광석 은행장(당시 부행장)은 신입사원 부정 채용에 권 행장이 연루된 사실을 보도한 셜록을 상대로 지난달 기사 삭제와 10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 신청했다. 셜록은 ‘내용에 허위가 없다’고 밝혀 조정이 불성립했다. 권 행장은 제소를 중도철회했다. 하나은행은 지난달 2주 연속 론스타 ‘먹튀’ 연루와 의혹과 부정채용, 옵티머스 사건 등 하나은행 비리 의혹을 다룬 MBC ‘스트레이트’ 제작진 2명을 형사고소하고 5억원의 손배를 청구했다.

MBC는 당시 “하나은행은 내용증명에서 어떤 부분이 허위사실인지는 밝히지 않았다”며 “기자 개인을 상대로 5억원 소송을 내고 이를 언론사에 알린 건 매우 이례적”이라고 했다.

박상규 셜록 대표는 “셜록 기자들이 우리은행 홍보실 직원과 만남으로 알고 나간 자리에 부행장이 직접 나와 권광석 은행장 비리 연루 기사만은 쓰지 말도록 끈질기게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이같이 은행권이 비리를 보도한 언론을 제소하는 행태에 “해당 기사들은 행장을 건드리는 이슈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해당 보도들은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 우리은행 권광석 행장, 하나은행도 함영주 전 행장이 언급된 비리 이슈를 보도하는데, 추가 취재를 봉쇄하고 타 언론의 보도를 막으려는 ‘엄포’ 격으로 본다”고 했다.

산업은행 측은 기자 개인을 상대로 손배를 청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소송과 관련해선 확인이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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