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1963년 ‘여자’라는 시를 지었다. 진보적 (남성)지식인이 ‘일반화한 여성’의 단면을 담은 글일 거란 사실은 저자와 제목만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같은해에 쓴 ‘죄와 벌’과 함께 김수영의 대표적인 여성혐오 작품으로 비판받는 이 시를 더 들여다보자. 

‘여자’란 시는 “여자란 집중된 동물이다”로 시작한다. 김수영은 한국전쟁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눈칫밥’을 먹었던 경험이 있다. 반공과 친공 사이에서 자신의 언행 하나가 생사를 가르는 긴장된 시공간이었다. 시인은 당시 경험을 통해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집중된 동물’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포착했다. 일시적 약자의 경험으로 사회적 조건이 만든 항구적 약자의 “설움”을 엿본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본성은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라며 정서적 거리를 뒀다. 

개인의 여러 삶들을 외면한 채 ‘여성’을 한 집단처럼 묶어냈다는 지적이나 민주화 이전 모더니스트들 젠더인식의 한계라고 평가하는 작업은 다소 진부하다. 이제 문학의 역할은 ‘여성’에게 설움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보단 김수영이 이기적이라고 평가했던 그들의 삶을 개별화하는 것이다. 그들이 왜 서로를 굳이 이해하지 않고 싶어하지, 이해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지, 그리고 불편한 감정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2020년 올해 젊은작가상(문학동네) 대상을 받은 작가 강화길의 단편소설 ‘음복’은 주목할 만하다. 소설 속 ‘나’는 시댁 제사자리에 참석한 사이에 집안의 서열과 분위기를 한눈에 파악하지만 평생 그 집에서 살아온 남편은 누가 자신을 싫어하는지, 누가 악역을 맡고 있는지 ‘무지(無知)’한 채 선하게 살고 있다. 김수영의 표현을 차용하면 남편은 ‘집중된 동물’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남편에게 ‘당신이 무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훈계하거나 가부장제를 비난하지 않았다. ‘나’는 ‘남성들의 질서’를 수행하다 치사하게 변해버린 시댁 여성들의 삶을 하나하나 공감한 뒤에도 냉소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낳게 될지 모르는 딸이 ‘무지’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는다. ‘나’는 그렇게 여성의 욕망을 금기시해온 가부장질서에 직면하면서도 욕망을 가진 주체로 산다.

▲ 연년세세(年年歲歲)/ 황정은 지음/ 창비 펴냄 
▲ 연년세세(年年歲歲)/ 황정은 지음/ 창비 펴냄 

 

한 여성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음복’이라면 황정은의 연작소설집 ‘연년세세(年年歲歲)’는 가부장질서에 지친 여성들 삶 내부로 깊이 들어가는 작품이다. 누군가 ‘문학의 쓸모’를 묻는다면 이 소설의 쓸모는 우리가 봐온 할머니, 고모, 이모, 어머니를 호칭 대신 그들의 이름 석자로 바라보게 만드는 효과에 있다. 

‘연년세세’는 ‘파묘’,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 등 4편의 단편소설이 서로 관점을 달리하며 이어진다. 중심인물은 어렸을 때 ‘순자’로 불린 1946년생 이순일이다.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며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순하게 커달라는 ‘순(順)’, 아들이었으면 하는 ‘자(子)’,라는 두 글자에 욱여넣기엔 부족한 수많은 순자의 비애를 펼쳐내려 한 건 아닐까 싶다.

파묘는 이순일이 자신의 유일한 친정식구인 할아버지 묘를 없애고 그의 유골을 수습해 화장하는 사건을 다뤘다. 이순일은 이제 관절이 좋지 않아 성묘를 가기 힘들어 파묘를 택했다. 이순일 입장에선 친정의 공간이 사라지는 중대한 사건인데 작가는 가족들이 이순일의 파묘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주변 인물들과의 권력관계나 정서적거리를 그려낸다. 

“한세진(이순일의 둘째딸)도 이순일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는 이순일에게 할아버지였고 한세진에게는 외증조부였다”(14쪽)를 보면 한세진은 엄마가 쓰는 호칭을 그대로 따른다. 한세진이 이순일과 정서적으로 명쾌하게 분리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소설에서 생경한 방식으로 보여줬지만 사실 엄마와 딸의 정서적 유착은 보편적 현상이다.

이순일은 첫째딸 한영진의 시댁 건물에 살며 한영진 부부의 살림과 육아를 돕는다. “기껏 아침을 차리면 쓱 보고 지 입에 다디단 것만 몇점 먹고, 아니면 컵라면이나 뜯어 먹고 쌩하니”(21쪽) 나가는 사위(한영진의 남편)의 눈치를 보며 살 줄 몰랐다고 이순일은 한세진에게 하소연한다. 

물론 이순일은 이런 하소연을 한영진에게는 물론, 뉴질랜드에 있는 막내아들 한만수에게도 하지 못한다. 한세진은 “대개는 그 이야기들을 그냥 들었다. 그래 엄마, 그래요, 하면서”(22쪽). 

이순일의 애도현장인 파묘 장소엔 한세진만 함께했다.

한영진과 이순일의 남편 한중언은 “거기 뭐가 있다고 매년 기를 쓰고 가냐”는 입장이었고, 특히 한중언은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던 사람이다. 가부장제가 만든 ‘어머니의 소외 또는 희생’의 공모자들이다.

다만 두 번째 단편 ‘하고 싶은 말’을 보면 야무진 커리어우먼 한영진과 순하게 자란 한세진의 묘한 권력관계가 잘 드러나면서 자매간 서열을 확인해준다.

한영진도 가부장제의 공모자인듯 그려지지만 한영진 역시 남편과의 관계에선 다른 모습이 등장한다.  

한 외국인이 길에서 한영진을 보고 데이트를 신청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영진은 즉각 스스로를 매력이 없다고 단정하며 그 외국인이 ‘종교단체나 다단계 조직’일 거라고 깎아내린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생각이 남편의 관점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 에피소드를 말했더니 남편은 그저 한바탕 웃어버리고 넘겼다. 소설 앞부분에서 보지 못한 한영진 캐릭터의 반전이다.

한국적인 현상이자 첫째딸의 무한책임을 나타내는 표현, ‘K-장녀’에서 한영진은 사실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 직후 생계전선에 뛰어들었고, 지금은 시댁을 통해 아랫집에 부모를 살게해 경제적으로도 책임지는 장녀의 모습을 보인다. 

이순일은 언제나 한영진에게 ‘하고 싶은 걸 다하며 살수 없다’고 말해왔지만 한국에서 딱히 내세울 것 없던 아들 한만수가 뉴질랜드에서 새 삶을 찾겠다고 하자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영진은 끝내 이순일에게 ‘왜 장녀와 막내아들에 대한 엄마의 태도가 다른지’ 묻지 못한다. 

이순일에겐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이순일은 그저 여느 부모처럼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138쪽)를. 그렇지만 이순일도, 한영진과 한세진도 모두 ‘순자’로 자랐다. 이순일에겐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한영진이 기특했을 것이고,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한세진이 편했을 것이고, 외국에서라도 밥벌이하는 한만수가 대견했을 것이다. 

▲ 연년세세 작가 황정은. 사진=창비
▲ 연년세세 작가 황정은. 사진=창비

 

사람은 주어진 환경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렵고, 가족질서 안에 갇힌 사람이 선의의 포장지를 두른 가족 내 착취를 알아차리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황정은은 캐릭터를 무기력하게 고정하지 않고 구조가 이어지더라도 폭력과 차별은 끊어야 한다는 관점을 서사에 녹이려 했다. 

마지막 단편 ‘다가오는 것들’을 읽다보면 처음엔 한세진과 하미영의 관계를 알아채기 어렵지만 이내 깨닫게 되면서 한세진 캐릭터에서 반전이 펼쳐진다. 하미영이 “로맨스와 화해에 관해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말했고, 한세진은 이런 하미영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K-장녀에게도 눌려사는 착한 둘째딸 이미지를 한세진에게서 한 겹 더 벗겨 낸다. 

이 작품은 가족관계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얽히고설킨 가족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과 ‘상처를 준 사람’은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이 둘간의 응어리는 사과와 용서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불편한 현실도 보여준다. 

세 번째 단편 ‘무명’은 이순일의 관점에서 다룬 순자의 이야기다. 어차피 연년세세는 진도를 빼기 바쁜 추리소설이 아니다. 중간중간 도돌이표를 달아놓은 듯 앞장으로 되돌아가 다시 음미할 때 독자들은 내 주변의 순자들을 떠올리며 각자의 해답을 고민하게 된다.

연년세세는 엄마 이순일과 두 딸 한영진·한세진 등을 표현할때 그들의 관계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관계에 대한 호칭으로 호명하지 않았고 오직 이름으로만 표기했다. 가족 내에서 엄마·딸 등의 위치가 아닌 인물 개인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다. 4개의 단편에서 집중하는 인물이 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 효과다. 

큰따옴표(“”)를 쓰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간 대화 부분임을 알아차릴 수 있고,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헷갈리지 않게 한 것도 황정은의 이번 문장들을 읽는 소소한 재미다. 교보문고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낭만서점이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소설가들은 ‘연년세세’를 2020년 올해의 소설 1위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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