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판사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보다는 대법원의 새로운 위자료 산정기준에 따라 위자료를 높이는 것이 언론 보도 피해구제를 위한 합리적 방안이라고 밝혔다. 

언론중재위원회가 지난 17일 비대면으로 진행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따른 법적·실무적 쟁점’ 토론회에 참석한 박재영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언론 보도 징벌적 손배 도입과 관련, “(미국에서) 이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배심에 의한 배상액 산정으로 (위자료) 예측 가능성이 없다는 것으로, 법의 지배 원리에 반한다. 지나치게 (배상액 산정이) 과도하면 정당한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재영 부장판사는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형사 절차와 행정이 잘 정비되어 있는데, 준형사적 성격의 징벌적 손배를 함께 적용하면 이중처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며 “국내 법률체계와 정합성·실효성 면에서 볼 때. 영미법에서 발전된 징벌적 손배를 (우리처럼) 대륙법 체계에서 받아들인 나라가 거의 없다. 미국에서도 징벌적 손배를 부정하는 주(州)가 있을 정도로 징벌적 손배제는 퇴조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고 밝혔다. 

▲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따른 법적·실무적 쟁점’ 토론회에 참석한 박재영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따른 법적·실무적 쟁점’ 토론회에 참석한 박재영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박재영 부장판사는 일련의 징벌적 손배 도입 논의가 “언론 보도 피해자에게 배상을 많이 받도록 하는 취지보다는 (언론에 대한) 응징과 억제가 주된 기능인 것 같다”고 밝힌 뒤 “결과적으로 민·형사 구분을 없애는 법의 퇴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도입될 경우는 “배심제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재판관이 편파적이고 일관성 없는 배상액 산정에 나설 위험을 어떻게 제어할지도 연구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언론 보도 징벌적 손배가 담긴) 상법개정안이 통과되어도 실제 소송에서 적용될 사례는 거의 없을 것”이라 전망하며 “기획소송이 증가할 우려도 있다”고 덧붙였다.

박재영 부장판사는 무엇보다 “언론 보도에 따른 정신적 손해는 굳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법원 재량으로 정할 수 있다. 현행 실무상 위자료를 적게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2016년 10월 대법원이 새로운 위자료 산정기준을 냈다. 위자료를 가중해서 확대하도록 했다”며 언론 보도 피해구제 문제는 “재판에서 위자료를 높이는 방안으로 해결하는 게 정도(正道)”라고 강조했다.

앞서 대법원은 명예훼손 일반피해 위자료 5000만 원, 중대 피해 위자료는 1억 원으로 하는 기준안을 마련했다. 명예훼손 사건의 경우 허위사실을 이용한 악의적·영리적 목적 등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때 특별가중사유로 판단, 가중금액도 산정했다. 이에 따르면 일반피해는 1억 원, 중대 피해는 2억 원의 위자료가 추가될 수 있다. 강제성이 있는 기준은 아니지만 법원도 명예훼손 위자료를 기존보다 높게 책정해야 한다고 판단한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당시 대법원의 위자료 산정기준 마련을 두고 조선일보는 2016년 10월25일자 기사에서 “법조계에서는 민사 재판 등의 위자료가 현실에 맞지 않게 낮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전하며 “(앞으로) 명예훼손 가해자에겐 최대 3억 원의 위자료가 부과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아직까지 이처럼 높은 위자료가 부과된 언론 보도 명예훼손 판례는 나오지 않았지만 최근의 징벌적 손배 논의가 ‘모멘텀’이 될 수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 양재규 언론중재위원회 연구팀장(변호사)은 “증액 배상을 중심으로 한 관련 법 개정안의 제안 이유를 살펴보면 실효성 있는 피해 구제제도를 확립하겠다는 목적도 강하다”며 “반드시 언론의 잘못된 보도를 처벌하기 위한 측면에서만 징벌적 손배를 봐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2010~2019년 언론 보도 손배소송을 보면 1990년대나 2000년대에 비해 오히려 손해배상 인용액이 낮아지는 추세”라고 전하며 “언론 보도 피해자들이 제도를 통해 충분한 피해구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불리는 증액 배상제도 도입 논의가 등장한 것 같다”고 밝혔다. 

▲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따른 법적·실무적 쟁점’ 토론회에 참석한 양재규 언론중재위원회 연구팀장.
▲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따른 법적·실무적 쟁점’ 토론회에 참석한 양재규 언론중재위원회 연구팀장.

양재규 연구팀장은 “재산상 손해는 객관적 자료로 증명하면 인정되는데 정신적 손해(위자료)는 객관적 자료로 증명이 어렵다. 결국 유사한 이전 사례를 토대로 위자료를 산정하는 게 현실이고, 그러다 보니 위자료 액수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며 “피해구제를 고려했을 때 인용되고 있는 위자료의 몇 배와 같은 형태로 증액하는 법 개정이 현실적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현 법안은 소송의 경우에만 징벌적 손배 청구가 가능하도록 했는데, 언론중재위 조정절차에서도 명백히 악의적인 허위보도의 경우 징벌적 손배를 적용하는 것을 비롯해 세부적 쟁점에 대한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석형 언론중재위원장은 이날 “국민 다수가 (징벌적 손배 도입) 법 개정을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 있는 반면, 언론계는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며 강력 반대하고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은 불가피하겠지만 당장의 제도도입 문제는 우리 위원회가 명시적 찬성이나 반대 의견을 내기엔 상당한 논의와 공감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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