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7시35분부터 KBS·MBC·SBS 등 주요 방송사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한민국 2050 탄소중립 비전 선언’을 생중계했다. 화면이 흑백으로 나오면서 적지 않은 시청자가 의아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는 청와대의 의도된 연출이었다. 고화질의 영상을 이용할수록 많은 탄소가 발생하기 때문에 흑백을 통해 탄소 절감의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다. 흑백 화면은 컬러 화면의 4분의1 수준 데이터를 소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보수성향의 KBS 공영노동조합이 11일 성명을 내고 10일 생중계를 “탁현민 왕(王)피디 사건”으로 명명하며 “KBS의 역할이 인력공급 대행 및 송출업체로 전락했고 공영방송 망가짐 이상의 문제를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KBS공영노조는 “탁현민의 흑백 화면 지시를 지침으로 하는 문자메시지가 제작진에게 전달됐다”며 “전 세계 한류 팬들이 KBS 콘텐츠를 보는 가장 중요한 창구인 KBS World조차도 이 같은 청와대 입김에 망가졌다”고 비난했다. 

KBS공영노조는 “히틀러식 사이비 민주주의의 중요 도구인 괴벨스 선전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며 “탄소중립선언 쇼를 중계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는 양에 차지 않는지, 제작의 구체적 방법까지 지시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KBS 공영노조 “王PD 탁현민 연출로 대통령 흑백TV쇼”’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며 “대통령 연설을 단순 중계하는 수준을 넘어 화면 구성 방식까지 청와대 지침에 따라 이뤄졌다는 내부 비판”이라고 보도했다. 중앙일보 역시 ‘“탁현민 왕피디 지침문자 왔다” 文 흑백연설 비판한 KBS노조’란 기사를 냈다. 

그러나 KBS공영노조 주장은 무리한 측면이 있다. 방송으로 나가는 대통령 행사의 경우 청와대 춘추관에서 송출 순번을 정하는데, 이를 키(KEY)사라고 한다. 이번에는 KBS가 키사였는데, KBS 역할은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행사한 준비를 송출하는 역할이었다는 게 청와대 측 설명이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11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대통령 행사는 청와대에서 제작한다. KBS는 제작에 관여할 수 없는 구조”라고 밝히면서 “흑백 화면은 제작 의도를 드러내는 연출 콘셉트였다. 연출 콘셉트를 정하는 곳은 청와대”라고 했다.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대한민국 2050 탄소중립 비전 선언’ 모습. ⓒ청와대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대한민국 2050 탄소중립 비전 선언’ 모습. ⓒ청와대

KBS 관계자 역시 “주최하는 쪽에서 기획하고 콘셉트를 잡는 것이다. 우리는 송출하는 역할만 한다. 다른 키사도 마찬가지”라고 전하며 KBS공영노조 성명을 두고 “도대체 무엇을 비판하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기획한 프로그램도 아닌데, 중계진은 뜨악하는 반응”이라고 했다. “제작의 구체적 방법까지 지시하고 있다”는 KBS공영노조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애초에 KBS가 제작 주체여야 하는데, 제작 주체는 청와대고 KBS 역할은 송출에 불과했던 것. 그러나 조선·중앙일보가 이 같은 일방의 주장을 인용 보도하며 탄소 감축을 위한 청와대의 연출마저 ‘언론통제’ 논란의 소재가 되어버린 모습이다. 

한편 이날 문 대통령은 “기후위기가 우리의 일상에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 지난 10년 사이, 100년 만의 집중호우, 100년 만의 이상고온, 100년 만의 가뭄, 폭염, 태풍, 최악의 미세먼지 등 ‘100년만’이라는 이름이 붙는, 기록적 이상기후가 매년 한반도를 덮쳤다”며 “기후위기는 코로나와 마찬가지로 가장 취약한 지역과 계층, 어려운 이들을 가장 먼저 힘들게 하다가, 끝내는 모든 인류의 삶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며 시급한 대응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이 지난해 처음으로 감소로 돌아섰고 올해 더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정부는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허가를 전면 중단하고 노후 석탄발전소 10기를 조기 폐지하는 등 석탄발전을 과감히 감축하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왔다”고 밝히며 “산업과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에너지 주공급원을 전환하고 저탄소 신산업 유망 업체들이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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