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노동자들이 분야를 관통해 열악한 지위와 위험 환경에서 일하다 죽거나 다치지만, ‘예술산업 특성’이란 이름에 가려 위험의 외주화가 일상화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문화예술 분야에도 노동안전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청년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2주기 추모위원회와 문화예술노동연대는 8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를 열었다. 공연과 영화, 방송, 출판, 웹툰·웹소설, 타투 등 문화예술인들은 불안정 계약을 이용한 쥐어짜기와 위태로운 노동, 편견 속에서 ‘또 다른 김용균’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는 극한의 과로와 위험노동에 내몰리지만 다친 뒤 산재 처리를 받는 경우는 소수에 그친다. 안병호 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산재보험에 가입한 제작사가 많아진 지금도 현장 안전교육이나 조치는 ‘꽉 잡아’ ‘조심해’ ‘떨어지지 마’가 전부”라고 했다. 지난해 영화산업노동조합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화스태프 응답자의 24%가 촬영 중 사고 경험이 있다고 했다. 폭파씬이나 차량씬에서 보호구를 지급받지 못했다고 답한 스태프는 73%였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8일 ‘또 다른 김용균,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에서 영화산업 산재 실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8일 ‘또 다른 김용균,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에서 영화산업 산재 실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영화스태프의 재해사고 처리방식(%). 2019년 영화스태프 안전보건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결과,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 자료집 발췌.
▲영화스태프의 재해사고 처리방식 조사 결과(%). 2019년 영화스태프 안전보건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결과,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 자료집 발췌.

노동자가 사고를 겪고서 산재 절차를 밟은 경우는 16.7%에 그친다. 안 위원장은 “산재 신청 뒤 불승인이 나오기도 하고, 오히려 단속적 계약 탓에 해당 프로젝트가 끝나고 제작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날까 두려워 산재 처리를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안 위원장은 “최근 스턴트맨이 촬영 중 차에 치이는 등 사고를 겪고 산재 처리가 가능한지 묻는 상담이 들어온다”며 “용역 등 근로계약이 없는 스태프 사고에는 제작 현장에서 누구 하나 책임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현실”이라고 했다.

방송제작 현장에서도 심각한 수준의 부상 혹은 사망이 끊이지 않지만 방송사가 산재 책임을 지는 경우는 드물다. 김기영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장은 최근까지 SBS ‘펜트하우스’와 OCN ‘본대로 말하라’, tvN ‘화유기’, 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등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가 골절과 화상, 하반신 마비, 사망 등 산재를 당한 사례를 열거했다. “이마저 심각해서 기사화가 됐지, 경미하거나 소규모 현장이라 조용히 묻힌 경우는 수없다.”

김 지부장은 “이들 스태프의 죽음과 부상은 엄밀히 말해 산재가 아니다. 이들은 프리랜서,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라며 “일부 제작사가 든 상해보험으로 치료비나 보상비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산재로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올해 지부 조사에 따르면 스태프의 20%는 ‘일하다 다치면 자비로 치료한다’고 밝혔다. 김 지부장은 “방송계에서 ‘진짜 사장’은 방송사인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방송계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대다수가 프리랜서 계약인 방송작가들도 일과 쉼의 경계가 모호하고 밤샘작업 환경에 놓인다. 그러나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산재 신청은 엄두도 못 낸다. 김한별 방송작가유니온 부지부장은 19년차 방송작가 A씨 사례를 들었다. A씨는 지난해 봄 200쪽 넘는 프리뷰와 원고를 쓴 뒤 염좌에 걸려 물건을 들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는 이후 근로계약을 작성하는 일터에서 일하며 산재보험에 가입했고, 염좌가 재발해 산재를 신정했지만 승인 받지 못했다. 김 부지부장은 “2016년 실태조사 결과 업무상 부상이나 질병을 얻은 이들 가운데 89%가 전액 개인비용으로 치료했다”며 “방송작가를 노동자로 인정하는 제대로 된 산재 보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청년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2주기 추모위원회’와 문화예술노동연대는 8일 ‘또 다른 김용균,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기영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장(왼쪽)과 김한별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부지부장. ‘청년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2주기 추모위원회’와 문화예술노동연대는 8일 ‘또 다른 김용균,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출판계 외주 노동자들은 출판사가 신간 물량 공세로 수익을 얻는 ‘신간 밀어내기’에 따른 과로를 강요 받고 있다.

김원중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사무국장은 “출판노동자들은 장시간 연장노동과 각종 스트레스로 위장질환, 어깨와 허리 등의 근골격계 질환, 정신 질환, 중증 질환 등을 앓고 있다”고 했다. 2013년 ‘외주출판노동자 노동실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마감 일정을 위해 1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는 81%에 이른다. 김 국장은 출판계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외주 단가를 현실화하며 ‘예술인복지법’ 적용 대상에 출판 외주노동을 포함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국공립‧민간공연단체 단원의 79%가 비정규직이고, 프로젝트성 공연의 경우 도급 계약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임인자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조합원은 지난 2018년 김천시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했던 프로젝트에서 산재로 숨진 고 박송희씨를 ‘위험의 외주화’ 사례로 들었다.

박씨는 지난 2018년 9월 본래 조연출로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무대감독 지시로 무대수정 작업을 하다 추락사했다. 안전 난간 조치나 주의 의무는 없었다. 검찰은 무대감독만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김천시와 문화예술위 등은 현재까지 사과를 포함한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임 조합원은 “박씨는 단기 비정규 스태프로 가장 열악한 지위에서 누구의 주의도 없이 사고를 당했고, 책임자들은 경력 미숙이란 이유로 희생자에 책임을 묻고 있다”며 재조사와 재발방지책 마련,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했다.

웹툰 작가인 정화인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조합원은 자신을 디지털 창작노동자 산재 사례로 들었다. 정 조합원은 “웹툰과 웹소설, 일러스트작가의 산업재해는 프리랜서란 형식을 빌미로 한 노동량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안명희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가 8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열린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에서 문화예술분야 노동자의 산재실태를 요약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안명희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가 8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열린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에서 문화예술분야 산업재해 실태를 요약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매주 연재로 밤을 새워 해 심리·육체적으로 힘들었다. 공황상태가 돼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은 불안장애가 생겼다. 과로사로 유서를 써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지만, 대중에게 작업이 즉각 공개되고, 마감을 못 지키면 역량부족 소리를 듣기에 질병 악화를 각오하고 완결할 수밖에 없다.” 정 조합원은 “디지털콘텐츠창작자 산재 발생은 물론 예방에서 기업의 책임은 철저히 빠져 있어 무엇보다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도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타투유니온지회장은 “타투 산업에서 산재는 시대와 문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법제도 탓에 생긴다”고 했다. 타투 노동자들은 20~30대가 대부분이나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손목터널증후군과 척골신경압박증후군 발병률을 보이고 있다. 김 지회장은 “타투이스트들이 노동안전 교육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업무상 질환을 얻고 있다. 관련 교육과 함께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타투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안명희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는 “문화예술노동자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완수해야 하는 과로와 장시간 노동, 우울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위험한 현장에 놓인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안 대표는 “불규칙한 노동시간에 대해 문화예술노동자의 결정권은 없지만, 문화예술산업의 특성을 이유로 이에 대한 발언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안 대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예술 노동자가 이렇게 일하다 죽거나 다치는 데 아무도 책임 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라며 “법제도 바깥에 밀려나 있고, 현장에서 책임지는 이도 없는 상황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해 최소한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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