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사장 선임과정에 공론화위워회 방식의 국민대표단 제도를 전격 도입해 국민들이 직접 사장을 뽑을 수 있게 하면 공영방송 종사자들이 정치권 눈치를 볼 일이 없어질 것이다. … 이런 의견성 글도 거의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온몸의 에너지가 빠져서 머리로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다.” (2019년 2월13일 이용마 MBC기자 페이스북. 그는 암 투병 끝에 그 해 8월21일 세상을 떠났다.)

유언이 되어버린 그의 열망이, 국회로 왔다. 1987년 KBS 기자로 입사해 공영방송과 30년을 넘게 함께했던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이 공영방송의 이사·사장을 선출하는 지배구조개선법안을 내놨다. MBC 후배 이용마의 ‘한’을, KBS 선배 정필모가 21대 국회에서 끌어 올렸다. 

“이용마는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언론개혁에 있어 동지적 관계였다. 이용마가 얘기했던 공영방송 독립은 자기희생을 통해 언론개혁의 상징이 됐다. 너무 일찍 가서 안타깝다. 그가 옆에 있었다면 내가 발의한 법안을 그 누구보다 지지했을 것이다.” 지난 27일 정 의원을 국회에서 만났다. 

정 의원은 지난 12일 ‘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방송통신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등 4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방송통신위원회는 국민 100명으로 구성된 ‘이사 후보 추천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이 뽑은 후보 중 다득표순으로 KBS·방송문화진흥회(MBC)·EBS 이사를 각각 13명씩 선출하게 된다. 공영방송 사장은 국민위원회가 투표로 추천한 복수의 후보 중 이사회가 특별다수제로 의결한다. 

이번 개정안에 언론노조 KBS본부를 비롯해 방송기자연합회, 한국PD연합회, 방송기술인연합회 등 노동조합·직능단체가 한 목소리로 환영 입장을 냈다. 이례적이다. 물론 당장 민주당 내에서 법안 통과 의지가 높지 않은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환영이었다. 정 의원이 말했다.

“우려 있다는 것 알고 있다.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KBS·EBS·방송문화진흥회(MBC) 이사 선출할 때 여야 정치권이 사실상 알게 모르게 추천해왔다. 이거 법에 없는 거다. 정치적 후견주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우리가 집권당일 때 먼저 고리를 끊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제 소신일 뿐만 아니라, 당내에 이런 생각 갖고 있는 분이 꽤 많다. 언론계 직능단체와 시민단체가 힘을 보태주면 긍정적 반응이 확산 될 것으로 본다. 충분히 법 통과 가능성이 있다.”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필모 의원실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필모 의원실

정 의원은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극복, 공수처 설치나 검찰개혁도 치열하게 논쟁 중인 시급한 문제고 집값 안정도 주요 현안이지만 많은 현안 때문에 언론개혁이나 미디어 혁신이 뒤로 밀린 감이 있다”면서 “언론이 바로 서며 공론장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이런 현안도 여론에 제대로 수렴되며 올바른 해결책을 찾게 될 수 있다”며 “논의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개정안의 핵심을 물었다. “공영방송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공영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다. 지금까지는 여야 막론하고 정치권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제는 여든 야든 정치 권력으로부터 공영방송이 당당해야 한다. 진실과 맥락을 제대로 다뤄내며 국민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품위있는 방송을 만들어내는 것이 개정안의 목적이다.” 정 의원은 개정안을 통해 “허위조작정보가 산업화되고 미확인정보가 넘쳐나는 환경에서 공영방송이 언론의 그린벨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개정안 중 방통위가 100명의 국민위원회를 임명하는 대목을 두고 일부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정치권이 100명을 나눠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 정 의원은 “우려는 안 해도 된다. 지역·성별·나이 등 인구학적 요소를 고려한 공론화위원회 구성방식이나 국민참여재판 제도에서의 배심원단 구성방식 등을 준용하면, 특정 정파가 추천하는 방식이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위원회 구성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이에 따르면 위원회는 말 그대로 ‘무작위’로 뽑힐 여지도 있는데, 이용마 기자가 구상했던 것과 거의 일치한다. 정 의원은 국민위원회 선출 방식을 시행령에 구체화할 것이라 했다.

정 의원은 “국민위원회는 공영방송 이사나 사장을 뽑기 위해 서류심사는 물론이고 후보자들의 PT와 면접 등을 통해 검증하고 필요하면 1박2일 숙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렇게 최종 후보자를 추천하고 방통위가 임명제청하면 된다. 사장 역시 국민위원회를 통해 복수의 후보자를 추천받아 이사회에서 특별다수제(이사 3분의2 동의)로 뽑는 과정을 거치면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지 않고 책임 있는 경영진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 의원은 이어 “앞으로 다른 의원들과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의 자격 조건에 대한 법안을 낼 것이다. 엄격하게 정치적 후견주의가 끼어들 수 없게끔 할 것이다. 정당에 몸담았던 분들은 적어도 3년, 또는 5년이 지나지 않고서는 지원할 수 없게 할 것”이라 예고했다. 그는 “이번 법안 발의가 전반적인 언론개혁과 미디어혁신 논의가 활발해지고 논의를 법제도로 뒷받침하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당내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선 미뤄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공영방송 3사. 디자인=안혜나 기자.
▲공영방송 3사. 디자인=안혜나 기자.

 

“공영방송은 언론의 그린벨트 역할 해야…조직문화 혁신 필수”

공영방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논의는 수신료다. 정 의원은 “시청료는 시청에 따른 대가이지만, 수신료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공영방송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공적 분담금이다. 지금까지 공영방송의 모습이 부족한 측면이 있어서 수신료에 회의적인 분들도 있지만, 미확인정보가 난무하는 환경에서 공영방송만이라도 진실과 맥락을 제대로 담아내려면 수신료는 분명히 필요하다. 수신료 분담은 국민의 의무다. 독일 등 유럽에선 수상기 보유 여부와 관련없이 수신료를 내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기 앞서 공영방송도 ‘쇄신’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공영방송은 언론의 그린벨트 역할을 해야 한다. 상업방송과 똑같이 만드는 건 공영방송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얼마 전 EBS처럼 금융컨설팅 프로그램을 하면서 사실상 시청자 정보를 금융사기업에 넘겼던 사건은 어떤 식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말 실망스럽고 아픈 실수다. 내부의 자정 기능도 없었다. 공영방송 구성원이 가져야 할 공적 책무와 윤리가 내재화되지 않은 결과다.” 앞선 국정감사에서 정 의원의 날 선 질의에 해당 프로그램은 폐지됐다. 

정 의원은 “EBS뿐만 아니라 KBS와 MBC도 지배구조 개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조직문화 혁신이다. 공영방송인으로서 책무와 윤리를 체화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갖다 줘도 좋은 역할을 못 한다. 영국 BBC도 정치적으로 지배구조가 완벽하지 않지만 공영성을 지켜낼 수 있는 건 체화된 조직문화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필모 의원실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필모 의원실

정필모 의원은 현재 공영방송지배구조를 포함해 미디어 전반의 법제도를 정비하는 당내 미디어 혁신위원회 준비TF에 참여하고 있다. 언론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TF의 ‘밑그림’을 물었다.  

“언론계 출신 의원들과 미디어업계 출신 의원들 중심으로 여러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미디어플랫폼 간 비대칭규제을 해소해야 하고, 유튜브 같은 오픈형 OTT, 넷플릭스 같은 구독형 OTT를 비롯해 새로운 유형의 미디어를 규율할 방법도 찾아야 한다. 5G와 ATSC 3.0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모바일 서비스를 비롯해 허위정보 관련 대책과 미디어리터러시가 모두 미디어 혁신과 관련돼 있다. 빠른 시일내에 혁신위원회를 운영할 것이다. 방송통신미디어 관련 거버넌스도 혁신위에서 논의하고 차기정부에서 반영해야 한다. 필요하면 당의 대선공약으로 내놓고 다음정부에서 달라진 환경에 맞게 정부조직개편을 해야 한다.”

혁신위원회에서 다룰 미디어의 범위를 물었다. “방송뿐만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디지털 플랫폼까지 다 다룰 예정이다.” 이에 따라 ‘허위조작정보 유통의 책임자’로서 구글과 페이스북도 미디어의 범위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딥페이크에 대한 윤리적 문제부터 알고리즘과 필터링에 따른 확증편향과 에코챔버 현상에 대한 대응까지 변화된 미디어환경에 맞는 다양한 논의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 의원은 무엇보다 “20년 전 만들어진 방송법이란 옷을 지금도 입고 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더 방치해선 미디어산업 발전에도 걸림돌이 된다”고 강조했으며 “공영방송 역시 공영서비스 미디어로 진화해야 한다”며 미디어혁신위원회를 통한 대대적인 법제도 개선 논의를 시사했다. 

정 의원은 “공영방송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국민들이 미디어를 제대로 선별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주요 관심사다. 지금 미디어시장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상한 구조다.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을 제도화해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선별하고, 공영방송이 언론의 그린벨트가 되면서 미디어 시장이 자율 정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영진(KBS 부사장) 퇴임하고 학교로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제의받고 고심하다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제안을) 수락했다. 현장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한국 저널리즘의 문제를 국회에 가서 제도적으로 개선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왔다.” 21대 국회에서 그의 목표는 “언론의 신뢰 회복과 언론을 보는 국민의 눈을 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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